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4⋅19 혁명과 민주당 정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 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 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http : //www.pa.go.kr/)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 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 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http://www.pa.go.kr/)

이 사료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 음성 기록물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1960년 4월 26일 전국 대학교수들의 시위를 정점으로 결국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하야를 하겠다고 발표한 내용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선거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 진압으로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처럼 호도하며 내무부 장관을 최인규에서 홍진기로 교체하여 정국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1일,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金朱烈, 1943~1960)의 시체가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는데,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대한반공청년단 특별단부 소속 폭력배들이 취재기자 일부와 학생들을 피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4월 19일 경찰이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쏴서 현장에서 21명이 즉사하고 172명이 부상당하였고, 그 뒤 시위 군중은 20만 명을 넘었다. 자유당 정권은 오후 2시 40분경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 오후 5시에는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날 서울에서만 104명(부상 후 사망, 경찰 3명 포함)이 피살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4월 20일 미 국무부가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4월 23일 장면(張勉, 1899~1966) 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였다. 4월 24일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 사퇴와 모든 공직 사퇴를 발표했지만 이승만은 발포 책임이나 부정선거 책임 등에 대해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전혀 물러날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이에 4월 25일 각 대학교수 300여 명이 모여서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다음 날인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3만여 명의 시위대가 다시 광화문 일대를 가득 채웠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의 재선거, 이승만 퇴진, 경찰 책임자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미국 측의 하야 압력이 거세진 가운데 국방장관 김정열(金貞烈, 1917~1992)과 외무장관 허정(許政, 1896~1988)이 하야를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이승만은 하야를 결심하였다. 4월 26일 오전 10시 30분, 라디오에서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다. 같은 날 오후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 내각책임제 개헌, 개헌 후 총선거 실시 등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4월 28일 새벽,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동반 자살하였다. 이날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5월 29일 아침 이승만은 김포공항에서 비밀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이승만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였으나 박정희(朴正熙, 1917~1979)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91세로 하와이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과정」,『역사문화연구』36,홍석률,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2010.
저서
『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
『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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