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박정희 정부와 민주화 운동

5⋅16 군사 정변시 내세운 혁명 공약

혁명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한국군사 혁명사편찬위원회 편, 『한국군사혁명사』제1집 상, 1963

혁명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편, 『韓國軍事革命史』제1집 上, 1963

이 사료는 5⋅16 군사 정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5⋅16 군사 정변의 이념과 성격을 밝힌 6개 항의 성명서이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대가 출동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박치옥 대령이 공수단을, 군단참모 홍종철 대령과 문재준 대령이 제6군단 포병대를, 구자춘 대령이 제933대대를, 백태하 중령이 제822대대를, 김인화 중령이 제911대대를 지휘하여 출동하였다. 한강대교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사격전을 벌인 뒤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육군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했고,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였다. 그리고 당일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각각 접수하였다. 공수단은 장면(張勉, 1899~1966) 총리가 머무는 반도호텔을 급습했으나, 총리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이날 서울 중앙방송국에서의 첫 방송에서 “우리 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쿠데타 목적과 「혁명공약」 6개 항을 발표하였다. 같은 날 육군본부 상황실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했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에 따라 민의원과 참의원,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이 해산되었다.

5월 18일, 윤보선(尹潽善, 1897~1990) 대통령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찾아오자 군사 정변에 항복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같은 날 장면 총리는 은신처에서 나와 중앙청에서 열린 제69차 임시 각의를 주재하여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고, 정부를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하였다. 그리하여 5월 20일에 첫 번째 군사 내각이 발표되었다.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에 의해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정치 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6월 6일 통치 기반이 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7월 3일 장도영이 축출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3년 간의 군정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쿠데타 세력은 군정 기간 동안 부정 선거 관련자를 척결하고 정치 깡패를 처단하는 등 국민들로부터 쿠데타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해 7억 2000만 환에 이르는 자금을 환수하였다.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해 생활 간소화⋅가족 계획⋅문맹 퇴치 운동 등을 실시했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와 화폐 개혁 등을 단행했으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또 증산⋅수출⋅건설을 경제의 3대 지표로 설정하고, 경제개발을 위한 주요 시책으로 첫째, 공업화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기간산업⋅에너지⋅농수산업 중점 개발, 둘째, 기간 종목인 화학 비료⋅시멘트⋅제철⋅정유 공장 등 건설, 셋째, 금융 제도 정비와 국⋅공영기업의 경영합리화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군정 기간 동안 중앙정보부에 의해 증권 파동, 회전당구기(파친코)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등 ‘4대 의혹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이에 박정희는 1961년 8월에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기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 박정희는 1963년 2월 27일 정치인과 국방장관, 3군 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민정 불참을 선언[「2⋅27선서」]하였다. 그런데 3월 16일 돌연 박정희는 4년간 군정 연장 및 국민투표 회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비판이 가해지자 박정희는 서둘러 군정 연장을 보류한다는 「4⋅8성명」을 발표했지만, 원대 복귀하겠다던 혁명 공약 제6조를 묵살하고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을 제치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1,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편저
『한국군사혁명사』1집, 국가재건최고회의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국가재건최고회의,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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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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