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박정희 정부와 민주화 운동

한⋅일 기본 조약과 부속 협정

한일 기본 조약

1965년 2월 20일 가조인

서명자 대한민국외무부아주국장 연하귀(延河龜)

일본외무성아세아국장 우시로쿠 도라오[後宮虎郞]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간의 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며 또한 선린관계 및 주권 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간의 관계의 정상화를 상호 희망함을 고려하고 양국의 공통의 복지 및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 및 안전을 유지하는 데 양국이 국제 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규정 및 1948년 12월 12일 국제 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제195호(Ⅲ)를 상기하여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따라서 그 전권위원을 다음과 같이 임명했다.

대한민국 (서명) 이동원(李東元) 김동조(金東祚)

일본국정부 (서명) 시이나 에쯔사부로[椎名悅三郞] 다카스키 신이치[高衫晉一]

이들 전권위원은 그 전권위임장을 상호 제시하고 그것이 양호 타당하다고 인정한 후 다음의 조항에 합의하였다.

제1조 양체약당사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체약당사국간은 대사 급 외교사절을 지체 없이 교환한다.

또한 양체약당사국간은 양국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호(Ⅲ)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중략)……

제7조 본 조약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이를 교환한다. 본 조약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각 전권위원은 본 조(條)에 서명 날인했다.

1965년 2월 20일 서울에서 동등히 정문(正文)인 한국어⋅일본어 및 영어로 본서 2통을 작성했다.

해석에 상위(相違)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본에 따른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서명)

이동원(李東元) 김동조(金東祚)

일본국을 위하여 (서명)

시이나 에쯔사부로[椎名悅三郞] 다카스키 신이치[高衫晋一]

한⋅일 재산 및 청구권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결정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같이 합의하였다.

제1조 1. 일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a 현재의 1080억원(108,000,000,000円)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불($300,000,000)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일로부터 10년간의 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매년의 생산물 및 용역의 제공은 108억 일본원(10,800,000,000円)으로 환산되는 3000만 아메리카합중국불($30,000,000)과 동등한 일본원(圓)의 액수를 한도로 하고 매년의 제공이 본액수에 미달되었을 때에는 그 잔액은 차년(此年) 이후의 제공액에 가산된다. 단 매년의 제공한도액은 양체약국 정부의 합의에 의하여 증액될 수 있다.

……(중략)……

제4조 1.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2.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에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전권위원은 본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동등히 정본(正本)인 한국어 및 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을 위하여 (서명)

이동원(李東元) 김동조(金東祚)

일본국을 위하여 (서명)

시이나 에쯔사부로[椎名悅三郞] 다카스키 신이치[高衫晋一]

동아일보사 편집부, 『동아연감』, 동아일보사, 1967

韓日 基本條約

1965年 2月 20日 假調印

署名者 大韓民國外務部亞洲局長  延河龜

日本外務省亞細亞局長   後宮虎郞

大韓民國과 日本國은 兩國間의 關係의 歷史的 背景을 考慮하며 또한 善隣關係 및 主權相互尊重의 原則에 立脚한 兩國間의 關係의 正常化를 相互 希望함을 考慮하고 兩國의 共通의 福祉 및 共同의 利益을 增進하고 國際平和 및 安全을 維持하는 데 兩國이 國際聯合憲章의 原則에 合當하게 緊密히 協力함이 重要하다는 것을 認識하고 1951年 9月 8日 샌프란시스코市에서 署名된 日本國과의 平和條約의 關係規程 및 1948年 12月 12日 國際聯合總會에서 採擇된 第195號(Ⅲ)를 想起하여 本 基本關係에 關한 條約을 締結하기로 決定하고 따라서 그 全權委員을 다음과 같이 任命했다.

大韓民國      (서명) 李東元  金東祚

日本國政府    (서명) 椎名悅三郞 高衫晉一

이들 全權委員은 그 全權委任狀을 相互提示하고 그것이 良好 妥當하다고 認定한 후 다음의 條項에 합의하였다.

第1條 兩締約當事國間에 外交 및 領事關係를 竪立한다.

   兩締約當事國間은 大使 及 外交使節을 遲滯없이 交換한다.

   또한 兩締約當事國間은 兩國政府에 의하여 合意되는 場所에 領事館을 設置한다.

第2條 1910年 8月 22日 및 그 以前에 大韓帝國과 日本帝國간에 締結된 모든 條約 및 協定이 이미 無效임을 確認한다.

第3條 大韓民國 政府가 國際聯合總會의 決議 第195號(Ⅲ)에서 明示된 바와 같이 韓半島에 있어서의 唯一한 合法政府임을 確認한다.

……(중략)……

第7條 本條約은 批准되어야 한다. 批准書는 可能한 한 早速히 서울에서 이를 交換한다. 本條約은 批准書가 交換된 날로부터 效力을 發生한다.

以上의 證據로서 각 全權委員은 本條에 署名 捺印했다.

1965年 2月 20日 서울에서 同等히 正文인 韓國語⋅日本語 및 英語로 本書 2通을 作成했다.

解釋에 相違가 있을 경우에는 英語本에 따른다.

            大韓民國을 위하여  (서명)

李東元  金東祚

            日本國을 위하여   (서명)

椎名悅三郞 高衫晉一

韓⋅日 財産 및 請求權問題 解決과 經濟協力에 관한 決定

大韓民國과 日本國은 兩國 및 兩國國民間의 請求權에 관한 問題를 解決할 것을 希望하고 兩國間의 經濟協力을 增進할 것을 希望하여 같이 合意하였다.

第1條 1. 日本國은 大韓民國에 대하여 a 現在의 1080億圓(108,000,000,000圓)으로 換算되는 3億 아메리카合衆國弗($300,000,000)과 同等한 價値를 가지는 日本國의 生産物 및 日本人의 用役을 本協定의 效力發生日로부터 10年間의 其間에 걸쳐 無償으로 提供한다.

每年의 生産物 및 用役의 提供은 108億日本圓(10,800,000,000圓)으로 換算되는 3000萬 아메리카合衆國弗($30,000,000)과 同等한 日本圓의 額數를 限度로 하고 每年의 提供이 本額數에 未達되었을 때에는 그 殘額은 此年 以後의 提供額에 加算된다. 但 每年의 提供限度額은 兩締約國 政府의 合意에 의하여 增額될 수 있다.

……(중략)……

第4條 1. 本協定은 批准되어야 한다. 批准書는 可能한 한 早速히 서울에서 交換한다.

    2. 本協定은 批准書가 交換된 날에 效力을 發生한다. 以上의 證據로서 下記 全權委員은 本協定에 署名하였다.

1965年 6月 22日 東京에서 同等히 正本인 韓國語 및 日本語로 本書 2通을 作成하였다.

1965년 6월 22일

大韓民國을 위하여     (서명)

李東元  金東祚

日本國을 위하여      (서명)

椎名悅三郞 高衫晉一

동아일보사 편집부, 『동아연감』, 동아일보사, 1967

이 사료는 1965년 2월 한국과 일본 간에 체결한 「한⋅일 기본 조약」과 1965년 6월 체결한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결정」(약칭 「한일 청구권 협정」) 조약 내용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 강화 정책을 더욱 확대하여 동북아시아에서 공산권 봉쇄 정책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동북아시아 지역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9월 미국과 일본은 강화 조약 및 미일 안보 조약을 체결하였고, 한국과 일본도 회담을 추진하여 1951년 10월 첫 번째 회담이 개최되었다.

일본은 1950년대 말 이른바 신무경기(神武景氣)를 겪으면서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해외 시장에 대한 요구가 강력해졌고, 그 결과 한일 회담에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 정부 또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거액의 외자가 필요하자 일본 자본에 기대를 걸고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한일 양국은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하였으나, 청구권 액수⋅평화선 문제⋅독도 문제 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여 비밀 회담을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金大平-]」를 통하여 한일 간의 가장 큰 쟁점이던 청구권 문제가 타결되고, 1964년 4월 어업 협정 문제 등도 타결되어 10여 년 만에 한일회담이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1964년 3월 정부가 한일 외교 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6⋅3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때 한일 회담이 중단되었다가 1964년 12월 7차 회담이 속개되었고, 1965년 6월 22일 일본 수상 관저에서 기본 조약과 이에 부속하는 4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기본 조약에 의하여 한일 양국은 외교⋅영사 관계를 개설하고 「한일병합조약」과 그 전에 양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으며, 일본 측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하였다.

또 부속 협정인 「청구권⋅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 저리 정부 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 차관(교환 공문)을 공여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66년부터 1975년까지 5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이 도입되었다. 「어업협정」에서는 양국 연안 12해리의 어업 전관 수역을 설정하고, 어업 자원의 지속적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정한 공동 규제 수역을 설정하였다.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에 의하여 재일 한국인이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문화재⋅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된 다수의 문화재를 반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서 한국이 지나치게 양보하여 국내에서 크게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은 그 뒤 일제 강점기 피해자 보상과 위안부 보상 문제 등과 관련하여 발생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일회담: 제1공화국의 대일정책과 한일회담 전개과정』, 박진희, 선인, 2008.
편저
『6⋅3학생운동사: 6⋅3학생운동 35주년 기념』, 6⋅3동지회, 역사비평사, 2001.
『한⋅일회담 관계자료』,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정부, 1997.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3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문제연구소, 아세아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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