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박정희 정부와 민주화 운동

6⋅3 한일 회담 반대 시위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비상 계엄 선포

“반성할 점 시인하나 불가피한 단안”

박대통령 담화요지

……(중략)……

지금 가정과 일터에서 이 예기치 않았던 갑작스러운 결정을 듣고 있는 국민 여러분들은 놀라움과 함께 불안한 느낌을 금치 못할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와 이 정부가 참을 대로 참다가 이 마지못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을 먼저 국민 앞에 밝혀두면서 이 나라 이 민족 발전을 위한 이 부득이한 조치를 깊이 이해해줄 것을 여러분의 애국충정에 호소하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5개월간 정부가 국민이 기대했던 바와 달리 다소 비능률적이었고 또한 반성할 점도 많은 것도 나는 솔직히 시인합니다.

이제 그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6월 중순부터는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본격적으로 일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이 중대한 전환기에 즈음하여 과격한 학생 「데모」는 결과적으로 어떠한 사태를 빚어 놓고 있습니까?

확실히 근간 국정전반에 걸쳐 일부 학생들의 도에 넘친 현실 참여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으며 특히 최근 나타난 학생들의 반정부적 파괴 행동은 어느 모로부터라도 불순하고 무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기여하를 불문하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함에 있어 평화적 시위의 한계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해괴망측한 방법과 극렬한 언동, 그리고 끝내는 공공시설의 파괴로써 민의에 의해서 선출된 정부를 부정, 도괴(倒壞)시키려는 불순한 경향이 노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수립된 정부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으로 도전함으로써 어려운 여건 하에서나마 경제적 난관과 민생문제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행정기능까지 마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켜 점차 탈락과 쇠잔의 길을 면치 못하게 될 이 현실을 보고 묵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시대감각으로 보아서 이상에 치우치는 까닭에 현실에 대해서 욕구가 불만함은 수긍하나 이 난국의 연원과 내일의 조국이 직면할 또 다른 문제에 관해 심려하거나 구체적인 방안을 과학적으로 구명함이 없이 우선 정권을 무너뜨려놓고 보자는 비지성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의 연속은 앞으로의 헌정(憲政)을 위해서 단호히 근절시켜야겠습니다.

지금 그들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게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고 정부도 없습니다.

법 위에 있고 법 테두리밖에 있는 방자한 그들의 난동으로 빚어지는 걷잡을 수 없는 혼탁 속에서 과연 무엇을 생산하고 무엇을 건설해나가겠습니까?

정부는 학생들에게 인내로써 끝내 다스리려 했으나 인내의 이 이상의 계속은 더욱 사태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 예측되므로 실효 없는 사후조치보다는 파국(破局)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 있는 사전조치가 절실함을 느껴 이 불가피한 단안을 내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오만과 불손의 파괴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없이 조성될 만성적 정치 불안을 우려하여 그 고질을 도려내어 차제에 「데모」 만능의 풍조를 발본색원할 방침인 것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불가피하게 요청된 계엄령선포가 결코 문제 해결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나 현실이 정치문제 이전으로 돌아가 국가 자체의 통치기능과 대의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엄연한 명제 앞에서 정부는 최단 시일 내에 안정을 회복시키는 한편 「데모」로써 혼돈된 행정력을 정비하여 민생문제를 비롯한 본연의 임무에 전력을 경주하면서 조속히 계엄을 해제할 것입니다.

계엄 기간 중 난동⋅파괴⋅불온한 선동⋅유언비어 조작을 비롯한 범법행위와 혼란을 틈탄 일체의 공산세력은 단호히 엄단될 것이지만 시민생활에 대해서는 추호의 위축도 주지 않을 것이며 모든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입법기능이나 정치활동은 정상적으로 보장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 과도적 조치를 악용한 간상모리행위나 경제질서 파괴범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국제사회의 주목 속에 있다는 사실과 이 고난의 극복이 민주적인 공동운명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자중자애하며 냉철한 이성으로 일관하여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 있기를 당부해 마지않습니다.

〈동아일보〉, 1964년 6월 4일

“反省할 點 是認하나 不可避한 斷案”

박대통령 담화 요지

……(중략)……

지금 家庭과 일터에서 이 예기치 않았던 갑작스러운 決定을 듣고 있는 國民 여러분들은 놀라움과 함께 不安한 感을 禁치 못할 것을 나는 충분히 理解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와 이 政府가 참을 대로 참다가 이 마지못한 決斷을 내리게 된 것을 먼저 國民 앞에 밝혀두면서 이 나라 이 民族 發展을 위한 이 不得已한 措置를 깊이 理解해줄 것을 여러분의 愛國衷情에 呼訴하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五個月간 政府가 國民이 期待했던 바와 달리 多少 非能率的이었고 또한 反省할 점도 많은 것도 나는 솔직히 시인합니다.

이제 그 間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6月 중순부터는 그 效果가 나타나게 되어 本格的으로 일하는 時期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이 重大한 轉換期에 즈음하여 過激한 學生 「데모」는 결과적으로 어떠한 事態를 빚어 놓고 있습니까?

확실히 近間 國政全般에 걸쳐 一部 學生들의 도에 넘친 現實 參與는 이 나라 民主主義의 앞날에 暗影을 던져주고 있으며 특히 最近 나타난 學生들의 反政府的 破壞 行動은 어느 모로부터라도 不純하고 無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動機如何를 불문하고 學生들이 自身들의 意思를 表示함에 있어 平和的 示威의 限界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해괴망측한 方法과 極烈한 言動, 그리고 끝내는 公共施設의 破壞로써 民意에 의해서 選出된 政府를 否定, 倒壞시키려는 不純한 傾向이 露骨的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合憲的인 節次에 의해 樹立된 政府에 대해 全面的인 否定으로 挑戰함으로써 어려운 與件下에서나마 經濟的 難關과 民生問題를 打開하려는 政府의 行政機能마저를 마비케 하고 對外的으로는 國家의 威信을 추락시켜 漸次 脫落과 衰殘의 길을 면치 못하게 될 이 現實을 보고 黙過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學生들의 時代感覺으로 보아서 理想에 치우치는 까닭에 現實에 대해서 欲求가 不滿함은 수긍하나 이 難局의 淵源과 來日의 祖國이 直面할 또 다른 問題에 관해 心慮하거나 具體的인 方案을 科學的으로 究明함이 없이 우선 政權을 무너뜨려놓고보자는 非知性的이며 無責任한 行動의 連續은 앞으로의 憲政을 위해서 斷乎히 根絶시켜야겠습니다.

지금 그들 一部 沒知覺한 學生들에게는 憲法도 없고 國會도 없고 政府도 없습니다.

法위에 있고 法테두리밖에 있는 방자한 그들의 亂動으로 빚어지는 걷잡을 수 없는 混濁 속에서 과연 무엇을 生産하고 무엇을 建設해나가겠습니까?

政府는 학생들에게 인내로써 끝내 다스리려 했으나 인내의 이 이상의 계속은 더욱 사태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 예측되므로 실효없는 사후조치보다는 破局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있는 사전조치가 절실함을 느껴 이 불가피한 단안을 내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오만과 불손의 파괴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없이 조성될 慢性的 政治不安을 우려하여 그 고질을 도려내어 차제에 「데모」萬能의 풍조를 발본색원할 방침인 것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불가피하게 요청된 戒嚴令宣布가 결코 문제 해결을 위한 最上의 방법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나 현실이 정치문제 이전으로 돌아가 國家자체의 統治機能과 代議秩序를 守護해야 한다는 엄연한 命題 앞에서 政府는 최단 시일내에 안정을 회복시키는 한편 「데모」로써 혼돈된 行政力을 정비하여 民生問題를 비롯한 본연의 임무에 전력을 경주하면서 조속히 戒嚴을 해제할 것입니다.

戒嚴 기간 중 난동⋅파괴⋅불온한 선동⋅유언비어 조작을 비롯한 犯法行爲와 혼란을 틈탄 일체의 共産勢力은 단호히 嚴斷될 것이지만 市民生活에 대해서는 추호의 위축도 주지 않을 것이며 모든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立法機能이나 政治活動은 정상적으로 보장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 과도적 조치를 악용한 간상모리행위나 經濟秩序파괴범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국제사회의 주목 속에 있다는 사실과 이 苦難의 극복이 민주적인 공동운명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자중자애하며 冷徹한 理性으로 일관하여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있기를 당부해 마지 않습니다.

〈東亞日報〉, 1964年 6月 4日

이 사료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1964년 6월 3일 20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선포된 비상계엄에 대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의 담화문이다.

1962년 11월 군사정부는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김종필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오히라 외상과 회담했고, 이때 청구권 문제를 타결하였다. 1963년 12월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 사절단을 맞아 한일회담의 최대 난관이던 평화선 문제와 어로 문제를 타결하고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1964년 3월 정부는 한일회담 재개를 결정하였다. 이에 야당은 3월 6일 회담 반대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 기구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하고, 구국 선언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그해 3월 24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 날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중고등학생까지 시위에 참가하였다. 국회에서는 군사 혁명정부가 1억 3000만 달러를 사전에 받아썼다는 이른바 일본 자금 사전 수수설이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4월 10일 공화당은 원내 총무단을 경질하였다. 4월 25일 공화당 중앙위원회는 박정희 총재에게 개각을 포함한 9개 항목의 시국 대책을 건의하였고, 5월 11일 정일권 내각이 발족하였다.

한편, 법원에서 학생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5월 21일 새벽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고 영장 발부 담당 판사를 협박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정계와 법조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분노한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며 ‘무단 정치 타도’를 부르짖었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단식 농성을 시작했으며, 6월 2일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주관적인 애국 충정은 객관적인 망국 행위임을 직시하고 현 정권은 하야하라”, “독재 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시위에 나섰다가 진압 경찰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1964년 6월 3일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교내에서 이케다, 김종필의 화형식과 5⋅16피고에 대한 모의재판, 성토대회 등을 개최한 다음 교문을 나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종로, 을지로, 청계천까지 진출하였다. 1000여 명의 시위대는 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여 연좌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총리를 비롯한 관계 각료와 연석회의를 열었으며, 임시 국무회의가 소집되어 계엄령 선포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날 밤 9시 40분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이 하오 8시로 소급되어 발포되었다. 6월 4일 자정부터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4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하였다. 이때부터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55일 동안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그리고 언론인 7명 등 총 348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포고령 위반으로 890건, 1120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중에서 540명이 군사재판, 86명이 민간 재판, 216명이 즉결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 선포 후 계엄을 초래한 일련의 사태에 대한 사후 처리와 시국 수습에 들어갔다. 먼저 김종필 공화당 의장을 해임하고, 중앙정보부는 반공과 국가 안보라는 본연의 임무만을 수행하게 한다고 발표하였다. 6월 11일 문교부는 서울 시내 각 대학에 3월 24일 이후의 시위 주동 학생을 퇴학 또는 무기정학시킨 뒤 그 결과를 18일까지 보고하고, 학생 선도에 비협조적인 교수를 징계하라고 지시하였다.

한편, 야당은 6월 10일 개최된 제43회 임시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제안하였으나, 여당의 반대로 폐기되었다. 제44대 임시국회가 들어선 7월 28일에야 해엄 결의안이 가결되어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 결의를 받아들였고, 7월 29일 계엄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5년 12월 「한일협정서」가 조인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6⋅3사태 ; 64년 봄의 한⋅일회담반대시위」,『신동아』1985년 6월호,서중석,동아일보사, 
저서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 편』1,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편저
『해방30년사』, 한국사료연구소, 성문각,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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