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박정희 정부와 민주화 운동

인혁당 재건위 사건

1. 개요

1) 조사 목적

○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세칭 ‘인민 혁명당 사건(1964)’, ‘민청학련 사건(1974)’,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왔다.

- 이들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고문 등을 통해 민주 인사와 학생들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들로서

- 특히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사건’의 경우 8명의 피고인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지 불과 18시간 만에 처형되어 사법 살인의 논란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다.

…… (중략)……

2) 사건개요 및 의혹 사항

다.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민청학련 관련 담화문에서 민청학련이라는 불법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인민 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발표한 뒤

○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과거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민 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도예종 등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속, 수사하였고

○ 도예종 등 사건 관련자들은 인혁당을 재건하려는 지하 비밀 조직을 만들어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 하는 등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1, 2심 군사 법정을 거쳐 1975년 4월 8일 7명이 사형⋅8명이 무기징역⋅4명이 징역 20년⋅3명이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는데

○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7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 등 총 8명에 대해서는 대법원에서의 형 확정 18시간 만인 다음날 새벽 4시 55분경부터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라. 이들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학생 데모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발생한 대형 공안 사건으로서, 학생 시위의 배후에 공산계 불순 세력이 있다는 중앙정보부 발표의 진위, 고문 조작 논란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져 왔다.

…… (中略)……

3. 조사 결과

(9) 인혁당 재건위 사건 소결

○ ‘인혁당 재건위’ 조직 결성 여부와 관련

- ‘인혁당 재건위’의 조직 결성을 뒷받침할 물증이 부족하고 지역 지도부 간의 위상 및 관계를 설명하지 못해 인혁당을 재건하고 민중 봉기를 통해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는 증명 불가능함

- 다만,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국내외 정세 토론과 학생 운동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클 형태의 모임을 가졌음은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했음

-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중정의 주장은 하재완 노트에 불과하고 평양방송의 내용을 지령으로 인식했다는 주장 역시 과도한 해석임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고문, 강압적인 수사 등 관행적이고 폭넓은 인권 침해 행위가 자행되었음을 부정하기 힘들고

- 중앙정보부가 초기부터 ‘인혁당 재건위’를 인지하고 조직 사건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다분히 임기응변적이어서 수사 종결 시까지 ‘혐의와 증거의 불일치’를 극복하지 못함

○ 유신 정권과 사법부는 관련자들을 부당한 군사 법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정권의 요구에 따라 처단한 것은 무엇보다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국가 폭력 행위임

○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반대신문 차단, 피고인들의 증인 신청 기각, 발언 저지 등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조치가 있었는데

- 공판조서는 심문 내용과 다르게 작성되었고, 군법회의 법을 근거로 피의자들에 대한 접견 금지 명령을 내려 피의자의 가족 및 변호인 접견권을 침해하였음

○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

-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 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전달되어 있었다는 의혹이 증언을 통해 제기되었고, 또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 조작된 최후 진술이 사형수들의 용공성 부각 등 언론의 여론 조작에 동원되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 위원회(2007년 10월 24일),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국정원「진실위」보고서⋅총론(Ⅰ)-』, 「인민 혁명당 및 민청학련 사건 발표문」, 166~199쪽

1. 개요

1) 조사목적

○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세칭 ‘인민혁명당 사건(1964)’, ‘민청학련 사건(1974)’,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왔다.

- 이들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시위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고문 등을 통해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들로서

- 특히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사건’의 경우 8명의 피고인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지 불과 18시간 만에 처형되어 사법살인의 논란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다.

…(中略)…

2) 사건개요 및 의혹사항

다.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민청학련 관련 담화문에서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발표한 뒤

○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도예종 등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속, 수사하였고

○ 도예종 등 사건 관련자들은 인혁당을 재건하려는 지하비밀조직을 만들어 학생 데모를 배후조종하는 등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1, 2심 군사법정을 거쳐 1975년 4월 8일 7명이 사형⋅8명이 무기징역⋅4명이 징역 20년⋅3명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는데

○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7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 등 총 8명에 대해서는 대법원에서의 형 확정 18시간 만인 다음날 새벽 4시 55분경부터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라. 이들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학생데모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발생한 대형 공안사건으로서,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계 불순세력이 있다는 중앙정보부 발표의 진위, 고문 조작 논란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져 왔다.

…(中略)…

3. 조사결과

(9) 인혁당 재건위 사건 소결

○ ‘인혁당 재건위’ 조직결성 여부와 관련

- ‘인혁당 재건위’의 조직결성을 뒷받침할 물증이 부족하고 지역지도부 간의 위상 및 관계를 설명하지 못해 인혁당을 재건하고 민중봉기를 통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는 증명 불가능함

- 다만,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국내외 정세토론과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클 형태의 모임을 가졌음은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했음

-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중정의 주장은 하재완 노트에 불과하고 평양방송의 내용을 지령으로 인식했다는 주장 역시 과도한 해석임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고문, 강압적인 수사 등 관행적이고 폭넓은 인권침해 행위가 자행되었음을 부정하기 힘들고

- 중앙정보부가 초기부터 ‘인혁당 재건위’를 인지하고 조직사건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다분히 임기응변적이어서 수사 종결시까지 ‘혐의와 증거의 불일치’를 극복하지 못함

○ 유신정권과 사법부가 관련자들을 부당한 군사법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정권의 요구에 따라 처단한 것은 무엇보다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국가 폭력 행위임

○ 공판과정에서 피고인의 반대신문 차단, 피고인들의 증인신청 기각, 발언 저지 등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조치가 있었는데

- 공판조서는 심문내용과 다르게 작성되었고, 군법회의법을 근거로 피의자들에 대한 접견금지명령을 내려 피의자의 가족 및 변호인 접견권을 침해하였음

○ 확정판결 18시간만에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

-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전달되어 있었다는 의혹이 증언을 통해 제기되었고, 또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 조작된 최후진술이 사형수들의 용공성 부각 등 언론의 여론조작에 동원되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2007년 10월 24일),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국정원「진실위」보고서⋅총론(Ⅰ)-』, 「인민혁명당 및 민청학련 사건 발표문」, 166~199쪽

이 사료는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 위원회’가 국가정보원 관련 주요 의혹 사건을 조사하고, 그 성과로서 2005년 12월 7일 공개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조사 결과 발표문의 일부이다.

유신 반대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4월 3일 특별 담화를 통해 민청학련이라는 불법 단체가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정체를 위장하고 사회 각계 각층에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다며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했다. 그 직후 중앙 정보부는 도예종, 서도원 등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며 이들이 인민 혁명당을 재건하고 반정부 학생 운동을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인민 혁명당은 10여 년 전인 1964년 8월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 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 했다는 이유로 국가 정보원이 도예종, 정도영 등 수십 명을 구속했던 사건과 관련된 단체로, 당시 이들이 결성했다는 조직 명칭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구체적인 증거나 일관된 진술 자료조차 없어, 중앙 정보부의 조작극으로 의심받으며 관련자 중 대다수가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

인혁당 사건 이후 10여 년이 흐른 1974년 4월 25일, 도예종 등 23명은 인혁당을 재건하였다는 이유로 또 다시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이들은 1)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국가 단체 조직(국가 보안법⋅반공법 위반), 2) 인민 혁명 전략에 기초한 국가 변란 획책(내란 예비 음모), 3)인민 혁명당 재건을 목표로 한 민청학련의 조직과 지도(긴급조치 1호 및 4호 위반)라는 죄목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피고인들의 상고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형량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 중 사형을 선고 받은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 대해서는 사형 확정 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법학자 협회는 이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 외의 구속자들은 무기 징역(이태환, 유진곤, 전창일, 이성재, 김한덕, 라경일, 강창덕), 징역 20년(정만진, 이재형, 조만호, 김종대), 징역 15년(전재권, 황현승, 이창복, 임구호), 징역 5년(장석구, 이현세) 등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한편 1974년 12월 9일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의 부인들이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구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종교계와 법조계 등 사회 저명 인사들이 이에 서명하며 동조했고, 이후에도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 독재가 계속되고 있는 여건 속에서 규명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어려웠다.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1998년 11월 9일 이돈명, 문정현을 공동 대표로 한 ‘인혁당 사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대책 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직권 조사를 개시하여, 2002년 9월 12일 “지난 1974년 인민 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유신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당시 중앙 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당시 사형 당한 8명의 유족들은 2002년 12월 10일 서울 중앙 지방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그 결과 2005년 12월 27일 서울 중앙 지방 법원으로부터 재심 개시 결정을 얻었다.

재심 개시 결정에는 그 직전인 2005년 12월 7일 발표된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 위원회’의 조사 결과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료에서 확인되듯, 조사 결과는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점, 북한과 연계되었으며 지령을 받았다는 주장도 과도하다는 점, 수사 과정에서는 불리한 진술을 강요 당하거나 고문,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또한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 지방 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검사가 항소를 포기함에 따라 무죄 판결은 일주일 뒤에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는 과거 국가 기관이 행한 고문과 조작에 의하여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더불어 과거 청산을 이룩한 획기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과와 의미」,『과거청산 포럼자료집』,김형태,포럼진실과정의,2007.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무죄판결의 의미와 사법과거청산의 과제」,『기억과 전망』16,이호중,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7.
편저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 주요 의혹사건편 上권』,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국가정보원, 2007.
『한국민주화운동사』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돌베개, 2009.
『유신과 반유신』, 안병욱,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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