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전두환 정부와 6월 민주 항쟁

5⋅18 민주화 운동시 광주 시민 궐기문

「광주시민군 궐기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 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또한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또한 나중에 알고 보니 군 당국은 계획적으로 경상도 출신 제7공수병들로 구성하여 이들에게 지역감정을 충동질하였으며, 더구나 이놈들은 3일씩이나 굶기고 더군다나 술과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합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 시민군에 대해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 믿어 주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0년 5월 25일

신동아 편집실, 『선언으로 본 80년대 민족⋅민주운동』『신동아』1990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1990

「광주시민군 궐기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또한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또한 나중에 알고 보니 군 당국은 계획적으로 경상도 출신 제7공수병들로 구성하여 이들에게 지역감정을 충동질하였으며, 더구나 이놈들은 3일씩이나 굶기고 더군다나 술과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합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 시민군에 대해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 믿어 주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0년 5월 25일

신동아 편집실, 『선언으로 본 80년대 민족⋅민주운동』『신동아』1990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1990

이 사료는 1980년 5월 25일 광주 시민군이 발표한 「광주시민군 궐기문」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12⋅12 군사반란과 5⋅17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였다. 이를 5⋅18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이라 한다. 당시 광주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 민주화 역행 조치에 항거했는데, 이에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과잉 진압했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1980년 5월 17일 학생과 시민의 시위에 맞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계엄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 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 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金大中, 1924~2009)⋅김영삼⋅김종필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하였다. 전국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5월 18일 10시경, 계엄군이 등교 중이던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출입을 제지하자, 학생들은 항의 시위를 벌이면서 시내에 집결하였다. 신군부는 그날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은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하였다. 5월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3000명 이상이었으나 다음 날인 5월 20일에는 2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5월 21일 오전 전라남도 도청과 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였고, 시민 대표가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되었다. 전라남도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

집단 발포가 일어난 5월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시작하였다. 같은 날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고,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표현하였다.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광주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 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었다. 그 뒤 군인들이 광주를 완전히 포위⋅봉쇄하였고 전국 각지에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

광주시민들은 계엄 해제와 자유 민주화와 민주 인사 석방을 요구하였고,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섰으며,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5월 22일 사태 수습을 위해 민주 인사로 알려진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 당국과의 대화나 건의, 협의 등을 담당하였다.

5월 27일 아침, 광주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전라남도 도청에 1만여 발을 발포하여 시민군을 살상하였다. 작전 개시 1시간 30분 만에 도청 진압이 완료되었고,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내지 ‘특수 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10일 동안 전개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결과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195명이 사망하였다. 그 외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제5공화국 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이 사주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하였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특별조사위원회’(약칭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6년 검찰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 문란 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 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광주 보고서: 광주민중항쟁』, 김양오, 도서출판 청음, 1988.
『5월 18일 광주(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김영택, 역사공간, 2010.
『5⋅18민중항쟁』, 김진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편저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동아시아평화인권한국위원회, 삼인, 2001.
『5⋅18은 끝났는가』, 학술단체협의회, 푸른숲, 1999.

관련 이미지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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