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남북 관계와 통일을 위한 노력

북한 공작원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

1⋅21 사건

서울시내에 무장간첩, 31명이 경복궁 뒤까지 침투

서울시내에 북괴의 무장간첩 31명이 출현, 우리 군경과 교전하여 1명이 생포되고 5명이 사살되었다(22일 하오3시 현재). 채원식(蔡元植) 치안국장은 22일 상오 인명살상과 파괴 목적을 띤 북괴무장간첩 31명이 21일 밤 서울외곽 지대에 침입, 경비 중이던 군경과 교전했다고 발표했다. 22일 아침8시 긴급 기자회견을 가진 채 국장은 이 간첩작전에서 최규식(崔圭植) 종로서장이 순직하고 그밖에 경찰관 2명이 부상했으며, 민간인 6명이 피살됐다고 밝히고 세검동→비봉산→고양→파주 방면으로 분산해서 도주 중인 괴한들은 지금 군⋅경이 추격중이라고 말했다.

종로서장전사 6명 피살, 시내버스 3대에 수류탄도

이날 밤 10시쯤 서울종로구 청운동 경복 중⋅고등학교 뒷담 근처에서 발견된 괴한들은 최서장이 지휘하는 경찰대와 교전 끝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기 시작했다. 괴한들은 쫓겨가며 세검동 고갯길에서 시내 버스 3대에 수류탄을 던지고 홍제동, 응암극장 앞 등 도처에서 군경 비상망에 걸려 총격전을 벌였다. 채국장은 파주⋅고양방면으로 달아난 간첩들을 추격하고 있는 군⋅경의 합동작전에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망했다.

25, 26세 내외의 청년들인 괴한들은 농구화에 양복바지를 입고 상의는 군복에 방한모를 썼으며 위에 오버-코트를 입고 있다.

채국장은 파주⋅고양⋅의정부 일대의 주민들은 산에 들어가지 말고 수상한 사람을 보는 대로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2천 4백명이 게릴라 훈련

21일 20시 시내로 돌격예정, 16일 평양출발, 전원 북괴군관

본사기자, 생포간첩과 일문일답

남파된 무장 간첩 일당은 청와대를 최종목표로, 조직적인 유격대 훈련을 2년 동안이나 받고 지난 16일 평양을 떠났다는 엄청난 사실이 최초로 생포된 1명의 무장간첩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이들 무장간첩들의 정확한 숫자는 모두 31명, 1명은 국군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국군복장으로 위장했으며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간첩작전을 시종 철야 현장 취재한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자가 생포된 김신조(27)와의 일문일답에서 밝혀졌다.

22일 상오 3시쯤 세검정 파출소 근처 민간에서 잠복 경비중이던 30사단 소속 김영상 상사와 차정식 2등병은 무장간첩 1명을 발견, 추격 끝에 생포했다.

무장간첩의 몸에서는 수류탄과 권총 그리고 자동소총이 나왔는데, 약 30분 후 홍제동 파출소에 마련된 임시 작전지휘본부에 끌려왔다.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자는 이 무장간첩과 홍제동 파출소에서 5분 동안의 일문일답을 가졌다. 간첩과 나눈 손기자의 1문1답은 다음과 같다.

▲ 문 = 이름과 나이는?

△ 답 = 김신조이다. 27세.

▲ 문 = 주소와 계급은?

△ 답 =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들이 있다.

▲ 문 = 무장남파된 목적이 무엇인가?

△ 답 =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하오 8시를 기해 돌격, 5분 내에 행동을 끝내고 청와대 지프 차를 빼앗아 대로로 문산 방면으로 도망치기로 했고 이것이 실패되면 비봉산 쪽으로 도보로 내빼기로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 문 = 몇 명이 왔는가?

△ 답 = 31명이 국군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국방군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았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 문 = 언제 넘어왔는가?

△ 답 = 16일 평양을 출발했다.

▲ 문 = 무기는?

△ 답 = 수류탄과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10개와 탄알 3백개씩을 가져 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가 군관이다.

▲ 문 = 연령들은?

△ 답 = 24세부터 28세까지다.

▲ 문 = 현재의 기분은 어떠시오.

△ 답 =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

김신조는 회견을 하는 동안 아주 체념한 듯 질문에 또렷한 목소리로 순순히 대답했다. 검은 농구화에 검은 목면바지, 상의는 우리 국군복장과 비슷한 국방색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파란 아랫도리 속 샤쓰를 입고 있었다.

김신조는 상오 3시 40분쯤 홍제동 파출소 임시작전본부에서 모 수사기관으로 연행되었다. 김신조의 옷주머니에서는 삐라가 발견되었는데 삐라 내용은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 취재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었으며 엿과 오징어를 가지고 있었다. 김이 신고 있던 신은 일제 농구화이고 괴뢰군이 만든 국방색 작업복에 흑갈색 민간인 오버를 입고 있었다.

생포된 간첩 김신조는 수사기관에서 “현재 북한에는 남한정부기관 폭파의 특수임무를 띤 특수유격대원 2천 4백 여 명이 훈련을 받고 있는데 3백 명을 1개 대대로 편성된 8개 대대가 있다”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1968년 1월 22일

1⋅21 사건

서울市內에 武裝間諜, 31名이 景福宮 뒤까지 浸透

서울시내에 북괴의 무장간첩 31명이 출현, 우리 軍警과 交戰하여 1명이 생포되고 5명이 사살되었다(22일 하오3시 현재). 蔡元植 治安局長은 22일 상오 人命殺傷과 破壞 목적을 띤 북괴무장간첩 31명이 21일 밤 서울외곽 지대에 侵入, 警備중이던 軍警과 交戰했다고 발표했다. 22일 아침8시 긴급 기자회견을 가진 蔡局長은 이 간첩작전에서 崔圭植 종로서장이 순직하고 그밖에 경찰관 2명이 부상했으며, 民間人 6명이 피살됐다고 밝히고 세검동→비봉산→고양→파주 방면으로 분산해서 도주 중인 괴한들은 지금 군⋅경이 추격중이라고 말했다.

鐘路署長戰死 6명 被殺, 市內버스 3臺에 수류탄도

이날 밤 10시쯤 서울종로구 청운동 景福 中高敎 뒷담 근처에서 발견된 괴한들은 崔서장이 지휘하는 경찰대와 交戰 끝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기 시작했다. 괴한들은 쫓겨가며 세검동 고갯길에서 시내 버스 3대에 수류탄을 던지고 弘濟洞, 응암극장 앞 등 도처에서 군경 非常網에 걸려 총격전을 벌였다. 蔡局長은 파주⋅고양방면으로 달아난 간첩들을 추격하고 있는 군⋅경의 합동작전에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망했다.

25, 26세 내외의 청년들인 괴한들은 농구화에 양복바지를 입고 상의는 군복에 방한모를 썼으며 위에 오버-코트를 입고 있다.

蔡局長은 파주⋅고양⋅의정부 일대의 주민들은 산에 들어가지 말고 수상한 사람을 보는 대로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2천 4백명이 게릴라 訓練

21일 20시 市內로 돌격예정, 16일 平壤출발, 全員 北傀軍官

本社記者, 生捕間諜과 一問一答

남파된 무장 간첩 일당은 청와대를 최종목표로, 조직적인 유격대 훈련을 2년 동안이나 받고 지난 16일 평양을 떠났다는 엄청난 사실이 최초로 생포된 1명의 무장간첩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이들 무장간첩들의 정확한 숫자는 모두 31명, 1명은 국군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국군복장으로 위장했으며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간첩작전을 시종 철야 현장 취재한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자가 생포된 김신조(27)와의 일문일답에서 밝혀졌다.

22일 상오 3시쯤 세검정 파출소 근처 민간에서 잠복 경비중이던 30사단 소속 김영상 상사와 차정식 2등병은 무장간첩 1명을 발견, 추격 끝에 생포했다.

무장간첩의 몸에서는 수류탄과 권총 그리고 자동소총이 나왔는데, 약 30분 후 홍제동 파출소에 마련된 임시 작전지휘본부에 끌려왔다.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자는 이 무장간첩과 홍제동 파출소에서 5분 동안의 일문일답을 가졌다. 간첩과 나눈 손기자의 1문1답은 다음과 같다.

▲ 문 = 이름과 나이는?

△ 답 = 김신조이다, 27세.

▲ 문 = 주소와 계급은?

△ 답 =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들이 있다.

▲ 문 = 무장남파된 목적이 무엇인가?

△ 답 =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하오 8시를 기해 돌격, 5분 내에 행동을 끝내고 청와대 지프 차를 빼앗아 대로로 문산 방면으로 도망치기로 했고 이것이 실패되면 비봉산 쪽으로 도보로 내빼기로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 문 = 몇 명이 왔는가?

△ 답 = 31명이 국군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국방군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았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 문 = 언제 넘어왔는가?

△ 답 = 16일 평양을 출발했다.

▲ 문 = 무기는?

△ 답 = 수류탄과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10개와 탄알 3백개씩을 가져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가 군관이다.

▲ 문 = 연령들은?

△ 답 = 24세부터 28세까지다.

▲ 문 = 현재의 기분은 어떠시오.

△ 답 =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

김신조는 회견을 하는 동안 아주 체념한 듯 질문에 또렷한 목소리로 순순히 대답했다. 검은 농구화에 검은 목면바지, 상의는 우리 국군복장과 비슷한 국방색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파란 아랫도리 속 샤쓰를 입고 있었다.

김신조는 상오 3시 40분 쯤 홍제동 파출소 임시작전본부에서 모수사기관으로 연행되었다. 김신조의 옷주머니에서는 비라가 발견되었는데 비라 내용은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 취재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었으며 엿과 오징어를 가지고 있었다. 김이 신고 있던 신은 일제 농구화이고 괴뢰군이 만든 국방색 작업복에 흑갈색 민간인 오버를 입고 있었다.

생포된 간첩 김신조는 수사기관에서 “현재 북한에는 남한정부기관폭파의 특수임무를 띤 특수유격대원 2천 4백 여 명이 훈련을 받고 있는데 3백 명을 1개 대대로 편성된 8개 대대가 있다”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1968년 1월 22일

이 사료는 1⋅21사건과 관련해 일간 신문에 게재된 내용이다. 1⋅21사건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다.

북한 124군부대 6기지(황해북도 연산군 방정리 소재) 소속으로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중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작전 지시를 받았고, 1월 17일 밤 11시경 미 제2사단 지역에서 남방 한계선 철책을 통과하였다.

이들은 다음 날인 1월 18일 한국군 군복에 제26사단 마크를 부착한 뒤 밤 10시경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군 삼봉산에서 이틀째 숙영을 하였다. 1월 19일 오후 2시경 민간인 우희재 등 4형제와 마주쳤으나 이들을 모두 살려 보냈는데, 귀가한 이들 민간인 4명은 같은 날 저녁 9시경 파주 천현지서에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신고하였다. 신고를 받은 제25사단 3개 대대 병력과 제6군단이 수색을 전개하였으나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북에서 내려온 31명은 1월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 북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21일 새벽 6시경 비봉 남쪽의 승가사(僧伽寺) 서남방 200m 지점에 도착하여 네 번째로 숙영하였다.

서대문 경찰서장 이각현(李珏鉉) 총경은 1월 21일 저녁 9시 55분경에 뒷산골에서 하산하는 괴한 30여 명을 발견한 뒤 병력 출동 준비를 하고 시경국장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때 헌병 3명을 포함한 병력 14명이 차량 3대에 나누어 타고 그들을 추적하였다. 보고를 받은 시경국장은 밤 10시경 6관구 및 경비사에 군 병력 협조를 요청하고, 경찰기동대와 종로경찰서장에게 출동을 지시하였다.

무장한 공비들은 자하문 초소 근처에서 경찰과 2~3분 동안 교전을 하였고,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여 승객을 사상하게 한 후 비봉, 인왕산, 의정부 방면으로 분산 도주하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 한 시민이 무장 공비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살당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4명이 피살되었다. 그 뒤 군경 합동 수색대는 소탕 작전에 나서 작전 도중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 1명을 생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 주석은 1⋅21사건이 좌경 극렬분자의 소행이었음을 시인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2월 7일 자주국방 태세를 선언하였고, 파월군을 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하여 병력 증강책으로 향토예비군의 편성과 무장화, 그리고 무기 생산 공장 건설을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4월 1일 20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편성하고, 1972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M-16 소총과 탄약 공장을 착공하여 1973년 11월 준공하였다.

또한 정부는 1968년 4월에 특수부대인 684부대(실미도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북한에 대한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다. 684부대원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게릴라 훈련을 받아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 병기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 완화와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관계기관은 이들 부대를 해체하고 부대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한 684부대 북파 부대원 24명은 실미도 사건을 일으켜 전원 폭사하거나 사형을 당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편저
『대비정규전사』Ⅱ, 나종삼 외, 국방군사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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