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남북 관계와 통일을 위한 노력

7⋅4 남북 공동 성명

7⋅4 남북공동성명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 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쌍방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 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데 합의하였다.

5. 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 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 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

1972년 7월 4일

합동통신사, 『합동연감』, 1975

7⋅4 남북공동성명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쌍방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 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데 합의하였다.

5. 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 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 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

1972년 7월 4일

합동통신사, 『합동연감』, 1975

이 사료는 1972년 7월 4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고 남북대화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남북한 당국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최초의 합의 문건이다. 이를 「7⋅4 남북공동성명」이라 한다.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 판문점에서 한국적십자사(현 대한적십자사) 대표 정홍진과 북한적십자사 대표 김덕현이 비밀 접촉을 가졌다. 1972년 5월 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했고, 5월과 6월 사이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6월 29일 이후락과 김영주가 그 동안의 회담 내용에 합의하고 서명하였으며, 드디어 7월 4일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아시아 기본 정책인 닉슨독트린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닉슨독트린은 세계 각지에서 미국 군사력을 철수함으로써 위기 구조를 해소하려는 것으로, 이념과 체제가 다르더라도 긴장 완화와 평화 공존을 추구하여 종국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1969년 8월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朴正熙, 1917~1979)와 리처드 닉슨은 공동성명 제5항에서 “양 대통령은 앞으로 한반도 긴장의 완화를 위한 장기적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런 닉슨 행정부의 방침은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화해를 추구하는 전제가 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하였다. 즉 통일 원칙으로 첫째, 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남과 북은 또한 상호 중상 비방과 무력 도발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하였고, 이러한 합의 사항의 추진과 남북 사이의 문제 해결, 그리고 통일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사이의 비밀 회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1972년 10월 남한에서 유신 체제가 시작되고, 같은 해 12월 북한에서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었다. 이 시기 남북한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통일 논의를 이용하려고 함으로써 「7⋅4남북공동성명」의 역사적 의미는 퇴색되었다. 그 뒤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남북조절위원회마저 중단되었다.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다음 날인 1972년 7월 5일 문화공보부는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보관 회의에서 “종래 북괴로 부르던 것을 북한으로 호칭하고, 김일성에 대한 중상 비방을 삼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 뒤 모든 언론과 정부의 공식 홍보물에서 ‘북괴’ 대신 ‘북한’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1974년 6월 남북이 다시 대결하는 국면이 되자 문교부는 ‘교육지도’에서 지리적 개념으로는 ‘북한’, 정치적⋅비인도적 개념으로는 ‘북괴’로 표현하도록 지시하였다. 언론은 이미 1974년 초부터 다시 ‘북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몇 가지 원칙은 1992년에 발표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2000년의 「6⋅15 남북 공동 선언」, 2007년의 「10⋅4 선언」 정신에 반영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미⋅중공, 미⋅소 접근과 긴장 완화 정책」,『국토통일』3-6,김영태,국토통일원,1972.
저서
『북한현대사 101장면』, 고태우, 가람기획, 2000.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 , 노중선, 사계절,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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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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