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면 망조 든 나라의 역사요, 혼돈의 역사이며, 실패의 기록이기도 했다. 이 피 어린 역사를 엮어 나가는 데 있어서 역사 창조의 주인공인 우리 민족이 자율성이 없고 사대주의와 이웃 나라의 지배에 좌우된 타율성을 볼 수 있다.
……(중략)……그 나라의 역사는 민족의 거울이요 등불이다. 과거 우리는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이 민족의 걸어갈 길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가 쓰러지고, 헤매다가 쓰러지는 고달픈 여정이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역사를 바로 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한국 민족의 주체성을 파악하고 한국 역사의 정신적인 기둥을 되찾아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비판적인 수용 자세를 확실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역사적인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세기 말엽에 유럽의 힘센 나라들이 동쪽으로 뻗어 온 이래 아직껏 미완성의 숙제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 민주 혁명의 목표인 것이다. 이번 5·16 군사 혁명이 국민 혁명으로 성공하려면 이러한 민족의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한국 근대화의 과제는 첫째로, 반봉건적이며 반식민지적 잔재로부터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 오늘날 후진국의 민족주의는 ‘가난한 세계의 소리’요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의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국제 외교를 통해 자기 나라의 중립과 안전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8·15 해방으로 독립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민족이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거룩해지기 위한 싸움은 아직도 험난하게 이어지고 있다. 민족 전체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로 뭉치는 길이 남아 있다. 지난 날 모든 민족이 전통 사회를 벗어나 근대 사회로 비약할 때는 어떤 경우에나 민족주의적 정열이 작용했다. 먼저 우리는 근대화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가난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켜 경제의 자립을 이루는 길이다. 우리 민족은 소규모의 농업 사회로서 항상 경제적 영세화에 시달려 왔고 가난은 고질화하여 탈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굳어져 있다. 민간에서 민족자본의 형성을 보지 못하고 정치 브로커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형적인 관권 의존 경제의 폐해는 굳어져서 근대화를 방해해 왔다. 따라서 건전한 경제 관념이 육성되지 못하고 되도록 ‘일하지 않고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다는 불로 소득을 추구하는 양반
의 경제 관념이 무사 안일주의를 키워 게으른 민족성을 이룩했다. 해방 16년 동안 기업 경영의 정신도 육성되지 못하고 화려한 도시의 기형적 비대화만 가져 왔다. 민중은 오래 동안 시달리는 가운데 ‘무표정한 반노예’가 되어 버리고 체념과 애수 속에서 허송세월하는 소극적 인간이 되고 말았다. 한국 역사의 전반을 지배해 온 토지 소유 제도인 토지 국유화의 관권적 지배 아래에서 민중의 사유 관념은 기운을 잃고 재건 의욕의 샘도 메말라 버렸다. 갇혀진 반도 안에서 강력한 전제 지배 아래에 억눌려 온 민중은 현실의 개혁이나 재건에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자포자기하여 비과학적인 미신, 점, 사주 등에 의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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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민중의 숙명관은 개척 정신도 육성하지 못하고 자유를 깨닫지도 못하게 하여 남에게 복종하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 민중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재건 의욕과 긍정적 인생관을 다시 찾게 하는 일이며, 개인을 자각한 사회적 인간을 형성하고 생산적인 인간, 노동하는 인간을 계몽, 육성하는 일이다.
셋째로 건전한 민주주의의 재건이다. 지난 16년 동안의 민주주의 수입의 역사를 반성해 볼 때 그 실패는 주로 외래 민주주의를 그대로 ‘직수입’하기만 하고 자기 민족사의 반성을 토대로 우리 생활 속에 뿌리 내리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 사회는 그 강인한 중앙 집권적 봉건성이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따라서 해방 16년의 역사 속에는 혈연적 가족 공동체의 ‘닫혀진 도덕’이 남아 건전한 개인의 자각을 키우지 못하고 문벌, 파벌 등이 큰 힘을 썼으며, 근대적 정당의 발생도 기운을 잃어 조선의 붕당
과 같은 당을 만들었다. 그 결과 전통적 지배 형태인 카리스마적인 1인 정치의 이승만 독재로 끝났다.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권력의 사용과 ‘제도화’하지 못한 개인 중심적인 정당=붕당
은 민주 정치가 실패하도록 만들었다.
'붕당'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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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형태는 수입하더라도 그 뿌리까지 수입할 수는 없다. 이제 늦게나마 ‘민주주의의 한국화’라는 과제를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방종과 같은 자유가 아니라 자율적인 자유이므로 민주주의에도 지도성이 도입되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과거 반봉건적, 반식민지적 지도 세력(자유당, 민주당의 근간이 된 해방 귀족, 지방 토호, 양반
등)을 그대로 둔 채 운영하려고 한 데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근대적인 새로운 지도 세력의 대두와 육성을 기초로 해야 할 것이다. 아래로부터는 농민 대중을 계몽, 육성하고, 위로부터는 새로운 지식인, 혁신적인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적 지도 세력을 키우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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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화의 담당자, 다시 말해 한국의 민주 혁명의 주인공을 찾아 길러 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 사상사의 주체성에 접목한 ‘민주주의의 한국화’를 기해야 할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일본 제국주의 이래 외래의 식민주의자의 이익 추구를 보장했고, 해방 후에는 관권과 결탁한 부정축재자를 위한 이윤 추구를 방조하여 부패, 부정의 온상이 되었다. 동양적 전통을 어느 정도 가진 한국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경제 개혁, 사회 혁명이 필요함을 우리는 민족사의 거울에 비쳐보고 찾아내야 한다.
박정희,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