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문학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기대로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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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문학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구경적(究竟的, 삶의 궁극적 의의, 절대적 진리의 깨달음을 탐구하고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자세)인 삶의 형식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구경적인 삶의 형식이란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먼저 모든 문화적 생산 혹은 창조는 삶의 긍정을 전제하고 출발한다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완전히 삶을 부정하는 데서는 문학뿐 아니라 일체의 문화는 생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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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금수(禽獸)나 가축류가 사는 것과 같은 넓은 의미의 모든 생명현상을 통틀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직업적 삶’이다. 오늘날의 인류라는 동물이 영위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삶의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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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는 삶의 연속성은 없다. 또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비교적 안일하게, 비교적 편리하게, 비교적 부유하게. 비교적 즐겁게 몇 십년 사는 대로 살다 없어져 버리는 것. 여기서 우리는 그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삶의 의욕이 여기서 채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그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생산(문화적)도 이 범주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 여기서 삶의 의욕이 끝나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다시 다음의 제3 단계의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구경적 삶(生)’이라 일컫는 것이다. 여기서 인류는 그가 가진 한도 끝도 없는(無限無窮) 의욕적 결실인 신명(神明)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명을 갖는다’는 말이 거북하면 자아 속에서 천지(天地)의 분신을 발견한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부연하면, 우리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천지에 태어나 한사람씩 한 사람씩 천지 사이에 살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적어도 우리와 천지 사이엔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유기적 관련이 있다는 것과 이 ‘유기적 관련‘에 관한 한 우리들에게는 공통된 운명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 우리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우리의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타개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사업을 수행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천지의 파편에 그칠 따름이요, 우리가 천지의 분신임을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 체험을 갖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천지에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우리의 이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타개에 노력하는 것, 이것을 가르쳐 ’구경적 삶‘이라 부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삶을 완수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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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내가 말하는 ‘구경적 삶’이란 반드시 종교를 통해서만 수행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문학을 통해서든, 철학을 통해서든, 혹은 정치를 통해서든 교육을 통해서든 가능해야 할 것이며 실지로 가능했던 것이다. ……(중략)……
둘째, ‘구경적 삶의 형식’만을 ‘문학하는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의의와 가치에는 수억, 수만의 등차가 있을 것과 같이 ‘문학하는 것’의 단계와 등차도 수억 수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위에서도 가장 높고 참된 의미에 있어 ‘문학하는 것’이란 ‘구경적 삶의 형식’이라 한 것이다. 내가 생각 하는 바 ‘문학하는 것’의 최고지향을 말한 데 불과한 것이다. (2월 10일)
『백민』 제4권 2호, 1948년 3월
김동리,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문학의 내용(이상성)적 기초를 위하여」, 『백민』 제4권 2호, 1948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