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효혜(孝惠)⋅고후(高后)의 시대(여태후(呂太后)의 섭정기 : 기원전 194~188)로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니, 요동 태수(遼東太守)는 곧 위만(衛滿)
을 외신(外臣)으로 삼아서 만리장성 이북[塞外]의 오랑캐를 지켜서 변경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천자(天子)께 입조(入朝)해 알현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을 것을 약조하고, 황제께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
은 군사의 위세(철제 무기)와 재물을 얻고 그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해 항복시키니, 진번(眞番)⋅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고조선의 영역은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위만(衛滿)' 관련자료
'위만' 관련자료
……(中略)……
위만
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서는 꾀어 낸 한(漢)나라의 망명인이 더욱 많아졌고, 또한 여전히 천자를 알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는데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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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 한나라의 사신 섭하(涉何)가 우거왕을 회유하였지만 끝내 황제의 조서를 받들지는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 부근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임하였는데 마부로 하여금 섭하의 송별을 맡은 조선비왕(朝鮮裨王) 장(長)을 척살하도록 하고, 즉시 패수를 건너서 새내(塞內)로 달려갔다. 마침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라고 하니, 천자가 그 공적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힐난하지 않았으며, 섭하에게 벼슬을 내려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이에 조선은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그를 기습 공격해 살해하였다. 이에 천자가 죄인을 모집해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였는데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으로부터 나와서 우거왕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우거왕은 군사를 일으켜 험지(險地)를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병(遼東兵)을 이끌고 먼저 멋대로 움직였는데,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도망쳐 돌아온 자가 많아 법에 따라 그를 참수하였다. 누선장군은 제병(齊兵) 7000으로 먼저 왕험(王險)에 이르렀는데, 우거왕이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고는 곧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자 누선의 군사가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중으로 도망쳐 10여 일을 보냈는데 점차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았다. 한편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군(浿水西軍)을 공격했지만 이를 깨뜨리고 스스로 전진할 수 없었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 생각하고,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왕을 회유하도록 하였다. 우거왕은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지만, 두 장군이 신을 속여 죽일까 염려하였습니다. 지금 신절(信節 : 천자의 사자가 갖는 징표)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고, 태자(太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도록 하고 말 5000필을 바치며, 또한 군량을 바쳤다. 조선의 무리 1만여 명이 병기를 들고 패수를 건너려 하였는데, 사자와 좌장군은 그 무리가 변심할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병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명하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여 살해할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무리를 이끌고 돌아왔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주살하였다.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이에 군대를 전진하여 왕험성 아래까지 이르렀고 그 성의 서북 방면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또한 가서 좌장군의 군대와 만나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왕이 끝까지 성을 굳게 지키니 수개월이 지나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中略)……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니계상(尼谿相) 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이 모의에 참석하여 말하길, “처음 누선장군에게 항복하고자 했지만 누선장군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이 홀로 군사를 아울렀으니 장차 전세가 더욱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맞서 싸우기 어려운데 왕은 다시 항복하려 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한음⋅왕겹⋅노인은 모두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사망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여름,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왔지만,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왕의 대신(大臣) 성기(成巳)가 또한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다시 군리(軍吏)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주살하도록 하니,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郡)을 세웠다.
……(下略)……
『사기』권115, 「조선열전」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