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이전단군에 대한 인식

조선 전기의 단군 인식

경승 부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입니다. 대저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이었으니, 지금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여 고친 적은 없습니다.”

『태종실록』권31, 16년 6월 1일(신유)

敬承府尹卞季良上書, 書曰. ……(中略)…… 吾東方, 檀君始祖也. 蓋自天而降焉, 非天子分封之也. 檀君之降, 在唐堯之戊辰歲, 迄今三千餘禩矣. 祀天之禮, 不知始於何代. 然亦千有餘年, 未之或改也.

『太宗實錄』卷31, 16年 6月 1日(辛酉)

이 사료는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조정에 올린 상소문 중 일부이다.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 단군(檀君)사전(祀典)에 등재하여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에 태종 12년(1412)부터 평양에 사당을 설치하고 단군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나아가 조정에서는 왕실의 제천(祭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유교적 명분에 따르면, 제천의 경우 천자국(天子國)인 중국에서만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변계량의 경우 제천의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로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다. 조선은 중국과 그 기원이 다른 나라라고 본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을 단군조선에서 찾았음을 의미하며, 고려 후기부터 단군을 시조로 한 인식이 확고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변계량이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서술대로 단군의 건국 시점을 무진년(戊辰年)으로 보고, 그때로부터 3000여 년이 되었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단군을 국조(國祖)로 인식한 것은 현재의 역사 인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만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이상주의가 추구되고 사림(士林) 세력이 학문과 정치를 장악하면서 단군의 역사적 위상은 변화하였다. 사림파들은 단군보다 기자(箕子)를 존숭하며 단군을 국조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군은 민중들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국가적 위기 속에서 더욱더 빛을 발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고려시대의 단군전승과 인식』, 김성환, 경인문화사, 2002.
『조선전기사회사상연구』, 한영우, 지식산업사, 1983.
편저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0.
『단군-그 이해와 자료』, 윤이흠 외 공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한국의 역사인식』상⋅하, 이우성⋅강만길 편, 창작과 비평사, 1976.
『단군과 고조선』, 이형구 편저, 살림터, 1999.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