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이전단군에 대한 인식

조선 후기의 단군 인식

상고(上古) 구이(九夷) 시대 초에 환인씨(桓因氏)가 있었는데, 환인이 신시(神市)를 낳고 비로소 생민(生民)의 정치를 가르치니, 백성들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신시가 단군(檀君)을 낳았는데,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살았으므로 이름을 단군이라고 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조선이란 동녘 가에 해가 뜬다는 명칭이다. 어떤 사람은, “선(鮮)이란 산(汕)을 말한다. 그 나라에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은)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도당씨(陶唐氏)가 즉위한 지 15년이 되던 해였다.

『기언』권32 외편, 「동사」단군세가

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 神市生檀君, 居檀樹下, 號曰檀君, 始有國號曰朝鮮. 朝鮮者, 東表日出之名. 或曰鮮汕也, 其國有汕水, 故曰朝鮮. 都平壤, 陶唐氏立一十五年.

『記言』卷32 外篇, 「東事」檀君世家

이 사료는 허목(許穆, 1595~1682)이 1667년(현종 8년)에 편찬한 『동사(東事)』 중 「단군세가(檀君世家)」의 일부로 그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은 병자호란(1636~1637)을 계기로 사상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던 여진족(女眞族)인 청(淸)에 패배하였을 뿐 아니라, 청이 사대(事大)의 대상이던 명(明)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른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 동요하고 있었다. 허목의 단군 인식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허목의 『동사』는 단군에서 삼국 시대까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역사서로, 이 사료에서 볼 수 있듯 단군은 세가(世家)라는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어졌다. 이는 그동안 단군이 외기(外紀)로 취급되거나 기자(箕子)의 부속 항목으로 기술된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후 단군의 역사적 위치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혀 갔다. 그러나 단군을 하나의 독립 항목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이 중국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였다. 오랑캐인 청이 중원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조선이 중화(中華) 문명을 계승하게 되었고, 그러한 조선의 역사 역시 유구하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료에서 단군조부를 환인씨(桓因氏)로, 부친을 신시(神市)라고 하여 마치 인명처럼 표현한 것은 단군의 부계(父系)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통설을 인정하지 않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환웅(桓雄)과 웅녀(熊女)의 이야기도 없애 버린 듯하다. 이는 단군 신화의 역사적인 사실성을 높이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단군은 조선의 문화적인 기원으로 평가되었고, 학자들에게 그 강역과 역사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그와 같은 관심은 집권당인 노론(老論)보다 소론(少論)이나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에게서 찾아지는데, 그 배경에는 단군을 통한 국가 개혁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고려시대의 단군전승과 인식』, 김성환, 경인문화사, 2002.
『조선전기사회사상연구』, 한영우, 지식산업사, 1983.
편저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0.
『단군-그 이해와 자료』, 윤이흠 외 공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한국의 역사인식』상⋅하, 이우성⋅강만길 편, 창작과 비평사, 1976.
『단군과 고조선』, 이형구 편저, 살림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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