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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발전

[한(韓)은] 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였으며, [그 수장이] 사철마다 [낙랑군을] 찾아 뵈었다. [후한(後漢)] 환제(桓帝, 재위 146∼167)⋅영제(靈帝, 재위 168~189)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郡縣)이 제어하지 못하니, [한나라 군현의] 백성[民]으로서 한국(韓國)에 유입된 자가 많았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이 사료는 한(韓), 즉 삼한(三韓)의 정치적 성장과 변화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국(辰國)이라는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진국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에는 더 이상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삼한으로 불리는 여러 정치 집단이 출현하는데, 이 사료에 보이는 것처럼 삼한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여 간섭을 받았다.

이후 삼한은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재위 146∼167)와 영제(靈帝, 재위 168~189) 말기, 즉 2세기 중반 이후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이때에는 낙랑군으로부터 삼한으로 유입된 백성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삼한의 정치⋅경제적 성장을 짐작하게 한다.

삼한의 정치⋅경제적 성장은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세기 후반~3세기 초반 삼한을 통치한 지배 집단의 무덤은 토광 목관묘(土壙木棺墓)에서 토광 목곽묘(土壙木槨墓)로 변화하였다. 토광 목곽묘는 땅을 파고 나무 관[목관] 주위에 나무로 그보다 넓은 공간[목곽]을 더 만든 무덤 양식을 말한다. 따라서 토광 목곽묘는 대체로 토광 목관묘와 비교해 볼 때 무덤의 규모가 크다. 또한 무덤에 넣는 물품, 즉 부장품(副葬品)의 양도 훨씬 많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무덤의 규모는 정치 권력의 크기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2세기 후반~3세기 초반 삼한 지역 무덤 양식의 변화는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권력의 성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삼한이 한나라 군현의 영향력에서 바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3세기 초⋅중반 한나라와 위(魏)나라가 낙랑군대방군(帶方郡)을 통해 삼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꾸준히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한(馬韓)의 목지국(目支國)⋅백제국(伯濟國)과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처럼 주변의 여러 정치 집단을 아우른 정치적 구심체가 등장하면서 점차 연맹체적 국가 체제를 형성해 나갔고, 이것이 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伽倻)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조선⋅부여⋅삼한」,『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송호정,서경문화사,2007.
저서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이현혜, 일조각, 1984.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이현혜, 일조각, 1998.
편저
「삼한의 정치와 사회」, 이현혜,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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