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이전여러 나라의 발전

삼한의 사회와 문화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000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들은 토착민으로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중략)……

마한에는 무릇 50여 개의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만여 호(戶)이다. 진왕(辰王)은 목지국(目支國)을 통치한다. 신지(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부례(濆臣離兒不例) 구사진지렴(狗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으로는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이 있다.

……(중략)……

한족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이나 대방군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중략)……

한족의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중략)……

항상 5월이면 씨 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국의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친 후에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섬기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관토록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었는데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자들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中略)……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中略)…… 凡五十餘國. ……(中略)……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中略)……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中略)……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中略)……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中略)……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毛本, 木, 作本, 誤.】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은 진(晋)나라의 진수(陳壽, 233~297)가 『위략(魏略)』 등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삼한(三韓)과 관련한 여러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는 삼한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으로 삼한을 연구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된다.

「동이전』 한(韓)조에 따르면,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한은 약 50여 개의 소국으로 이뤄졌고 진한과 변한에 속한 소국은 이보다 적었다. 소국은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처럼 왕의 호칭을 가진 존재가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장수(長帥)가 통치하였다고 한다. 장수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마한에서는 세력이 강한 이들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서는 이러한 장수에게 관직과 인수(印綬)를 주어 간접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는데, 일제 강점기 발견된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이라 새겨진 도장은 이를 입증한다. 장수 등에 의한 소국의 통치 체계는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곧 삼한의 통치 질서가 완비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 체계적인 국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삼한 사회는 ‘왕’으로 표현된 존재를 정점으로 신지⋅읍차 등의 장수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하호(下戶)’라 불렸는데, 이들은 토착 생활을 하며 농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은 일반적인 농업 사회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삼한에서는 음력 5월에 씨를 뿌리고 10월 농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료상에는 제사의 대상이 단지 ‘귀신’으로 되어 있지만, 이 제사 자체가 농사와 관련 있는 만큼, 이는 바로 ‘농업신’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군무를 추는데, 땅을 밟는 동작은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육력(生育力)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제사는 일종의 축제로 거행되어 구성원 간에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국읍 장수의 정치 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 국읍에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었다는 점은 삼한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문제로 중요하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과 유사하므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도를 복원해 보면 현재 서낭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도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곳으로 도망 온 죄인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소도가 신성한 특수 구역임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삼한이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소도의 주관자와 천군의 관계 등은 여전히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삼한 시대의 읍락과 사회』, 문창로, 신서원, 2000.
『고대 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박대재, 경인문화사, 2006.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삼한 사회 형성 과정 연구』, 이현혜, 일조각, 1984.
편저
『진⋅변한사연구』, 노중국⋅주본돈⋅이희준 외,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02.
『마한사연구』, 박순발 외, 충남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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