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신비로운 건국 이야기의 세계

대가야의 건국 이야기

(고령은)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자세한 것은 김해부(金海府)의 산천(山川)조 이하를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무릇 16세 520년이다【최치원(崔致遠)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大伽倻)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고 되어 있으니, 즉,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 된다. 그러나 이는 가락국(駕洛國) 고기(古記)의 여섯 알 전설과 더불어 모두 근거가 없고 허황되어 믿을 수 없다. 또한 『석순응전(釋順應傳)』에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正見)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라고 하며, 신라에 결혼을 청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다고 되어 있으니 이뇌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참고할 것이 못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경상도」 고령현 건치연혁

本大伽倻國【詳見金海府山川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五百二十年【按崔致遠, 釋利貞傳云,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爲伊珍阿豉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 然與駕洛國古記六卵之說, 俱荒誕不可信. 又釋順應傳, 大伽倻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軰之女, 而生太子, 則異腦王乃惱窒朱日之八世孫也. 然亦不可考】.

『新增東國輿地勝覽』卷29 「慶尙道」 高靈縣 建置沿革

이 사료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인문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중 경상도 고령현의 연혁을 전하는 기사로 대가야(大伽倻)의 건국 신화를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흔히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 신화라고도 하는데,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수로왕(首露王, 재위 42~199) 신화와 더불어 가야의 건국 신화를 대표한다. 다른 나라의 건국 신화와 달리 가야의 경우 복수의 건국 신화가 남아 있는 것은 가야가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였기 때문이다. 다만,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건국 신화만 남아 있다는 점은 이들이 가야 연맹의 맹주국이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다른 나라 건국 신화에 비해 내용이나 구조가 간략하다. 하지만 대가야는 물론이고 가야 연맹의 체제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한 사료이다.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건치연혁(建置沿革)조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의 별칭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인데, 그는 산신(山神)인 정견모주(正見母主)와 천신(天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의 결합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천신과 지모신의 결합에 의한 출생 신화라는 점에서 다른 건국 신화와 비슷한 면이 있으며, 천신과 산신의 후손임을 강조해 지배 세력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건국 신화는 주인공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卵生)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대가야의 건국 신화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견모주가 알을 2개 낳았다는 민간전승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가야의 건국 신화에도 원래 난생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건국 신화와 달리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난생적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가야 산신인 정견모주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과 『석순응전(釋順應傳)』에 의하면 천신(天神)인 이비가지보다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의 권위가 앞설 뿐 아니라 대가야의 왕계(王系) 또한 정견모주를 기준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고령 지방에 토착 세력이 대가야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하며, 수로왕 신화를 비롯해 다른 건국 신화에서 주인공이 외래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던 점과 대비된다. 또한 대가야와 금관가야를 이끌던 중심 세력이 서로 계통을 달리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석이정전』에 기록된 것처럼 대가야 왕 뇌질주일과 금관가야 왕 뇌질청예(惱窒靑裔)가 형제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기왕에는 이 대목을 중시하여 가야가 5가야 내지 6가야 연맹체를 형성한 근거로 삼기도 하였지만, 근래에는 대가야가 성장하면서 금관가야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내걸었던 전략적 표현일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학계에서는 처음에는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의 맹주였지만, 대체로 5세기 후반 무렵부터 대가야가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새롭게 성장한 대가야가 이전 시기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와의 혈연적 유대 관계를 내세움으로써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를 형제 관계로 설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건치연혁조를 제외하면 관련 문헌이 없기 때문에 건국 신화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기가 어렵고, 더욱이 고령현 건치연혁조의 상당 부분은 최치원의 『석이정전』과 『석순응전』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은 9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승려 순응(順應, ?~?)과 이정(利貞, ?~?)의 전기인데, 이들은 9세기 초에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승려의 전기에 대가야의 건국 신화가 수록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해인사가 가야산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두 승려의 전기를 찬술하는 과정에서 최치원이 가야산과 관련되어 있는 대가야의 건국 신화를 언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아울러 정견모주의 ‘정견(正見)’이나 ‘월광태자(月光太子)’ 등의 인명에서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나는 점이나 ‘가야’라는 국명이 가야 당대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가야산이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이 사료와 같은 형태로 대가야의 건국 신화가 정형화된 시기를 해인사가 창건되던 9세기 초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인사를 개창한 순응과 이정의 전기를 지은 최치원이 말년을 해인사에서 보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대체로 가야 연맹의 패권이 대가야로 옮겨 간 이후의 사정을 반영한다. 또한 여타의 건국 신화와 달리 외래 세력보다 토착 세력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다만 이 설화 역시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이 있는 만큼, 적절한 사료 비판과 더불어 그러한 요소가 신화에 덧붙여지게 된 배경에 주목한다면 한층 더 대가야 건국 신화의 원형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가야의 건국 신화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전승되었는지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대가야의 세계와 도설지」,『진단학보』81,김태식,진단학회,1996.
「가야의 건국신화와 제의」,『한국고대사연구』39,남재우,한국고대사학회,2005.
「가야의 개국설화에 대한 검토」,『역사와 현실』33,백승충,한국역사연구회,1999.
「대가야의 신앙과 제의」,『가야사연구 : 대가야의 정치와 문화』,최광식⋅노중국 외 공저,한국고대사연구회,1995.
저서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김두진, 일조각, 1999.
『가야연맹사』, 김태식, 일조각, 1993.
『신라와 가야의 건국신화』, 박상란, 한국학술정보(주), 2005.
『대가야의 형성과 발전 연구』, 이형기, 경인문화사, 2009.
편저
「가야의 건국 설화」, 김태식, 국사편찬위원회, 2003.
「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 백승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혜안, 2001.

관련 이미지

지산동 고분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