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고구려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고구려의 왕실 인식과 왕계

이이모(伊夷模)는 아들이 없었는데, 관노부(灌奴部) (출신의 여인과) 사통(私通)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위궁(位宮)이라고 하였다. 이이모가 죽자 (위궁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지금 고구려 왕 궁(宮)이다. 그 증조(曾祖)의 이름도 궁(宮)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그가 성장하자 과연 흉학하여 여러 차례 (중국을) 침략하였다가 도리어 고구려가 피해를 입었다. 지금 왕도 태어나면서부터 또한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가리켜 ‘위(位)’라고 하는데, 그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그에게 위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위궁은 힘이 세고 씩씩하였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을 잘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伊夷模無子, 淫灌奴部, 生子名位宮. 伊夷模死, 立以爲王, 今句麗王宮是也. 其曾祖名宮, 生能開目視, 其國人惡之. 及長大, 果凶虐, 數寇鈔, 國見殘破. 今王生墮地, 亦能開目視人. 句麗呼相似爲位, 似其祖, 故名之爲位宮. 位宮有力勇, 便鞍馬, 善獵射.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이 사료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것으로, 3세기 중반 고구려의 왕위 계승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 왕이었던 이이모(伊夷模)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위궁(位宮)이 즉위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위궁의 출생과 관련한 내용, 즉 이이모가 관노부(灌奴部) 여인과 사통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본기」에서는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이 주통촌(酒桶村)의 여인과 사통해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을 낳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이모는 산상왕, 위궁은 동천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동천왕의 이름이 위궁이라고 하여 태조왕(太祖王, 재위 53~146) 궁(宮)과 닮았다고 한 점이나, 동천왕이 그의 이름을 이어받았다고 기술한 점이 흥미롭다.

태조왕은 ‘태조(太祖)’라는 명칭이 ‘큰할아버지’라는 뜻을 갖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왕조의 개창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는 동명성왕(東明聖王, 재위 기원전 37~기원전 19) 주몽이며, 그 이후 4명의 왕이 더 있었다. 따라서 태조왕과 그 이전 왕들의 계보를 어떻게 이해할 지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왕을 배출하는 그의 소속 부(部)가 교체되었다고 보기도 하며, 왕을 배출하였던 계루부(桂婁部) 내의 방계(傍系)가 즉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태조왕이 고구려 왕계에서 갖는 특성을 고려해 보면, 동천왕이 그와 닮았다고 인식된 점이나 그의 이름을 딴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동천왕 대에는 태조왕을 왕실의 중요한 시조로 인식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4세기 중반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대 종묘(宗廟)를 수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주몽을 시조로 하는 왕실 계보의 정리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된다. 5세기에 건립된 「광개토왕 비문(廣開土王碑文)」 첫머리에 주몽이 시조로 나오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4⋅5세기 고구려 왕실의 세계인식 변화」,『한국고대사연구』4,조인성,한국고대사학회,1990.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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