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왕위가) 17세손(世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에 이르렀는데, (태왕께서는)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하였다. (태왕의) 은택(恩澤)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달하였다. …… 쓸어서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번성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지만) 하늘이 (이 나라를)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시어 (태왕께서는)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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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5년(395) 을미인 해에 왕은 패려(稗麗)가 ……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가에 이르렀다. 그 3개의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의 동래성(東來城)⋅□성⋅역성(力城)⋅북풍(北豊)⋅오비(五備)□를 지나며 영토를 살펴보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속민(屬民)으로 (고구려에) 조공(朝貢)하였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 391)에 건너와 백잔을 공파하고 …… 신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에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 …… 영팔성(寧八城)⋅구모로성(臼模盧城)⋅각모로성(各模盧城)⋅간저리성(幹氐利城)⋅□□성⋅각미성(閣彌城)⋅모로성(牟盧城)⋅미사성(彌沙城)⋅□사조성(舍蔦城)⋅아단성(阿旦城)⋅고리성(古利城)⋅□리성(利城)⋅잡진성(雜珍城)⋅오리성(奧利城)⋅구모성(勾牟城)⋅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수(頁)□□□□성⋅□이야라성(而耶羅城)⋅전성(瑑城)⋅어리성(於利城)⋅□□성⋅두노성(豆奴城)⋅비리성(沸利城)⋅미추성(彌鄒城)⋅야리성(也利城)⋅태산한성(太山韓城)⋅소가성(掃加城)⋅돈발성(敦拔城)⋅□□□성⋅누매성(婁賣城)⋅산나성(散那城)⋅나단성(那旦城)⋅세성(細城)⋅모루성(牟婁城)⋅우루성(于婁城)⋅소회⋅연루성(蘇灰燕婁城)⋅석지리성(析支利城)⋅엄문□성(巖門□城)⋅임성(林城)⋅□□□□□□□리성(利城)⋅취추성(就鄒城)⋅□발성(拔城)⋅고모루성(古牟婁城)⋅윤노성(閏奴城)⋅관노성(貫奴城)⋅삼양성(彡穰城)⋅증□성(曾□城)⋅□□노성(盧城)⋅구천성(仇天城) ……을 공취하고, 그 국성(國城)을 ……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여러 차례 전투하였다. 왕위(王威)가 격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니, 창끝을 보내 성을 압박한 것과 같았다. □□귀혈(歸穴) …… 다시 성을 포위하니, 백잔의 군주가 곤경에 직면해 남녀 1천인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며 왕에게 꿇어앉아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하였다. 태왕께서는 은혜로 어리석은 허물을 용서하고, (항복한) 이후의 정성을 받았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 군주의 아우 및 대신 10인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8년(398) 무술(戊戌)에 편사(偏師)
소규모 군대
를 파견하여 신(愼)의 영토와 산곡을 관찰하도록 하였는데,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00여 인이 잡혀 갔기 때문이었다. 이후 (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9년(399) 기해(己亥)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和通)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을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니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의 은혜와 자애로 그 충성을 아끼어 사신을 보내 돌아가 (고구려의) 계책을 알려 주도록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통해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왜가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바야흐로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성 …… 하였고, 왜구
가 크게 무너졌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寐錦)
이 몸소 고구려에 와 일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 매금
이 …… 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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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금(寐錦)'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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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404) 갑신(甲辰)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 석성(石城), 배를 이어 …… 왕이 몸소 …… 이끌고 …… 평양을 거쳐 …… 서로 조우하였다. 왕의 군대[王幢]가 요로(要路)의 길을 끊고 공격하니 왜구
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하였다.
'대방(帶方)'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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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407)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 전투하여 모조리 살상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1만여 벌이었고, 얻은 군수 물자와 기계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가 사구성(沙溝城)⋅누성(婁城)⋅□주성(□住城) □성□□□□□□성을 공파하였다.
20년(410) 경술(庚戌) 동부여(東夫餘)는 예로부터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
동부여의 왕성
에 도달하자, 부여의 나라가 놀라 …… 왕의 은덕이 두루 미치자 이에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또한 그 나라에서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가 미구루(味仇婁)⋅압로(鴨盧)⋅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압로였다. 무릇 [태왕께서]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광개토왕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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