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고구려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충주 고구려비와 중원 지역

5월에 고려 대왕(高麗大王)의 상왕공(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대대로 형제같이 지내고 상하(上下)가 화목하게 천도(天道)를 지키기를 원하여 동쪽으로 왔다. ……(중략)…… 12월 23일 갑인(甲寅)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亐桓奴)와 주부(主簿) □□□□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와 □□노(奴)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충주 고구려비」

五月中, 高麗大王相王公□新羅寐錦, 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東來之. ……(中略)…… 十二月廿三日甲寅, 東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 前部大使者多亐桓奴, 主簿□□□□境□募人三百. 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奴□□□□盖盧, 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忠州高句麗碑」

이 사료는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의 일부이다. 「충주 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1979년 조사에서 알려진 석비(石碑)로, 충주의 옛 지명에 따라 「중원 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로도 불리며 남한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비석이다. 현재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연대는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5세기 중반 내지 후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때 고구려는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해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침범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후로 신라는 5세기 중반 내지 후반까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사료에 보이는 ‘신라 토내 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 준다. ‘신라 토내 당주’는 신라 땅에 있는 고구려의 관료와 군인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를 파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신라의 국내 정치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 군사가 신라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왕을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일화는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이처럼 5세기 정치⋅군사적으로 우위에 선 고구려는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신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차등적인 복속 관계를 설정했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의 상왕공(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각각 형과 동생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다. 상왕공은 고구려의 국왕 또는 재상급 신료를, 매금은 신라의 국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신라 국왕이 동생으로서 아랫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료 외에 「광개토왕 비문(廣開土王碑文)」에서도 고구려가 신라를 속민(屬民)으로, 즉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로 인식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강한 국력을 가진 5세기 고구려인은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주변 국가들을 이끌어 가는 세계를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427년(장수왕 10) 압록강 변에 있던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남진 정책(南進政策)을 펼치며 남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이때 고구려 남진 정책의 중심지는 국원성(國原城), 즉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이었다. 남한강(南漢江) 중류에 위치한 충주 지역은 강의 물길을 이용한 수운(水運) 교통의 요충지로,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전하는 「충주 고구려비」가 지금의 충주시에 세워졌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편저
「영토 확장」, 공석구,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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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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