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고구려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연개소문의 집권

개소문(蓋蘇文)【혹은 개금(蓋金)이라고 한다】의 성(姓)은 천씨(泉氏)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라고 하여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외모가 웅장하면서 기품이 있었고 적극적이고 호방하였다. 그 아버지 동부(東部)【혹은 서부(西部)라고 한다】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은 마땅히 그의 지위를 계승하고자 하였지만, 국인(國人)은 (개소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하여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그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개소문은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에게 사죄하고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부탁하였으며, 만일 잘못된 점이 있으면 비록 내쫓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그를 애처롭게 여겨 마침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나, (개소문은) 흉악하고 잔인하였으며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여러 대인(大人)과 왕은 몰래 (개소문을) 죽이고자 논의하였는데 일이 새어 나갔다. 개소문은 부병(部兵)을 모두 모아 놓고 마치 군대를 사열할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성 남쪽에다 술과 안주를 성대히 차려 두고, 여러 대신(大臣)를 불러 함께 (사열식을)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이르자 모두 살해하니 모두 100여 명이었다. (그리고)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왕의 시신을) 잘라 여러 토막으로 내고 도랑에 버렸다.

(개소문은)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의 관직과 같았다. 이에 (개소문은) 전국을 호령하였고 나라의 일을 마음대로 하였다.

삼국사기』권49, 「열전」9 개소문전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氷1)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 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嗣位, 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并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賔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宫, 弑王斷爲數段, 弃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攴. 其官如唐兵部尚書兼中書令職也. 於是號令逺近, 専制國事.

『三國史記』卷49, 「列傳」9 蓋蘇文傳

1)성암본⋅《삼국사절요》⋅을해목활자본에는 水로 되어 있다.

이 사료는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의 정변과 집권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측의 기록을 가져온 것으로, 고구려의 정치 변동에 대한 당나라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연개소문에 관해서는 중국 측 사서뿐 아니라 남생(男生, 634~679)과 헌성(獻誠, 659~701)의 묘지명에도 중요한 정보가 많다. 이들 묘지명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조부 자유(子遊)와 부친 대조(大祚)가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했고, 대대로 병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이 사료에서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따르면, 그의 가문이 그러한 전승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물과 관련한 출생 설화는 비단 연개소문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의 고대 설화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왕실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4~5세기 귀족 가문의 전승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연개소문 가문은 적어도 조부 때부터 고위 귀족 가문으로 활동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 초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 귀족 세력이기보다는 평양 천도 이후 새롭게 성장한 가문으로 생각된다.

연개소문은 부친의 사후 국인(國人)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때의 국인은 고구려의 주요 귀족 세력을 가리킨다. 양자의 갈등은 연개소문 정변의 배경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주요 귀족 세력의 대당 온건 노선과 연개소문 세력의 대당 강경 노선이 대립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다음으로 연개소문이 신진 귀족 세력으로 여겨지듯 주요 귀족 세력과 정치적 기반이 다른 데서 갈등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물론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연개소문의 집권을 전후해 정치 구조 및 운영 방식이 크게 변하였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한다.

연개소문 정권의 정치 구조는 그가 차지한 관직의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 이 사료에서 연개소문은 부친의 관직, 즉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를 계승하고자 하는데, 정변 이후 그가 취임한 관직은 막리지(莫離支)였다고 한다. 남생의 묘지명에도 연개소문의 부친은 막리지였다고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개소문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고 나오기도 한다. 이에 따라 대대로막리지가 동일 관직인지 아닌지, 막리지가 어떠한 성격의 관직이었는지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연개소문의 집권과 도교」,『역사학보』99⋅100합,이내옥,역사학회,1983.
「연개소문의 집권과 그 정권의 성격」,『이기백선생 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전미희,일조각,1994.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김영사, 2005.
『한국고대사의 연구』, 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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