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삼국의 귀족회의

고구려의 대대로 선출

대대로(大對盧)는 힘으로써 서로 싸우고 빼앗아 스스로 차지하니, 국왕의 임명을 받지 않는다.

『주서』권49, 「이역열전」41 고려

그 나라의 관직으로 높은 자를 대대로(大對盧)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唐)나라의] 1품(品)에 비견된다. [대대로는] 국사(國事)를 총괄하며 3년에 한 번씩 바꾸는데, 만약 직을 잘 수행하는 자는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대대로를] 교체하는 날, 만약 서로 승복하지 않으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 나라의 국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서로 공격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다.

『구당서』권199상, 「열전」149상 동이열전 고려

其大對盧, 則以彊弱相陵, 奪而自爲之, 不由王之署置也.

『周書』卷49, 「異域列傳」41 高麗

其官大者號大對盧, 比一品. 總知國事, 三年一代, 若稱職者, 不拘年限. 交替之日, 或不相祗服, 皆勒兵相攻, 勝者爲之. 其王但閉宮自守, 不能制禦.

『舊唐書』卷199上, 「列傳」149上 東夷列傳 高麗

이 사료는 『주서(周書)』와 『구당서(舊唐書)』 고려전(高麗傳)의 일부로, 6~7세기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었던 대대로(大對盧)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먼저 『주서』에 따르면 고구려의 대대로는 힘으로써 서로 싸우고 빼앗아 스스로 차지하였고, 국왕이 임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구당서』의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는데, 대대로는 3년마다 한 번씩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만약 서로 승복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해 이기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처럼 6~7세기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었던 대대로가 국왕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당시 왕권과 귀족 세력과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일찍이 고구려는 3세기 후반 이후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종래 나부(那部)의 지배층이었던 제가(諸加)는 중앙 귀족으로 변모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지배층은 국왕 아래의 신료 집단으로 일정한 관등과 관직을 지니고 이를 기반으로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이후 4~5세기 고구려의 중앙 정치는 국왕을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 대에 들어서 장기간의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게 시작했고, 6세기 중반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 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고구려의 왕권은 약화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에 나오는 안원왕의 시해와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의 분쟁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안원왕의 후사 문제를 둘러싸고 고구려 귀족들이 추군과 세군으로 나뉘어 싸우면서 대규모 유혈 분쟁이 발생했다고 한다. 귀족들이 왕위 계승에 개입하게 되면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대신 귀족 세력이 정치 운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인 대대로를 두고 위의 사료처럼 여러 귀족 세력이 다투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6~7세기 고구려의 대대로 선출이 이 사료처럼 항상 분쟁의 연속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를 보면, 7세기 중반 고구려의 국정(國政)은 상위 다섯 관등 소지자가 논의⋅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때 상위 다섯 관등 소지자는 당시 고구려의 핵심 귀족 세력으로, 이들이 국정을 논의한 자리는 일종의 귀족 회의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귀족 회의를 통해 여러 귀족 세력들은 각자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편저
「중앙통치조직」, 임기환,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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