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삼국의 귀족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와 4영지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논의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가 좌중으로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는데, 알천공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담소를 나누며 태연하게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여력이 이와 같아서 상석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4영지(四靈地)가 있어 장차 나라의 큰일을 논의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 논의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4영지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라 하고,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于知山)이라 하며,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라 하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라 하였다. 진덕여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正旦禮]를 행하였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의 칭호도 쓰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권1, 「기이」2 진덕왕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㑹于南山亐知巖, 議國事. 時有大虎, 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撲於地而殺之. 閼川公膂力如此, 䖏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霊地, 將議大事, 則大臣必㑹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青松山, 二曰南亐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郎号.

『三國遺事』卷1, 「紀異」2 眞德王

이 사료는 알천(閼川)을 비롯한 6명의 대신이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논의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특히 신라의 주요 국정을 논의한 화백 회의가 어디에서 열렸고 또 어떠한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였는지 이 사료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화백 회의를 이해하는 기초 자료로서 이 사료가 갖는 비중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 화백 회의가 열렸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 사료에 등장하는 나랏일을 논의하는 자리가 바로 화백 회의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여러 연구자들이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왔다.

우선 회의석상에 나타난 호랑이를 알천이 제압한 다음 그가 상석에 앉았다고 한 점이 주목된다. 『삼국사기』 진덕여왕(眞德女王) 원년(647)조에 따르면 알천은 이해 2월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우지암 회의 때 상석에 앉았다는 점을 들어 상대등이 곧 화백 회의 의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지암 회의가 열린 시점이 진덕여왕 대라면 그 주장은 설득력이 있지만, 반대로 진덕여왕 대가 아니라면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우지암 회의가 열린 시점을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 사료가 『삼국유사』 진덕왕조에 수록된 점 등으로 미루어 상당수 연구자들은 진덕여왕 대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알천은 상대등 지위에 있었던 까닭에 우지암 회의의 상석에 앉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상대등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대등(大等)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알천을 제외한 임종(林宗) 등 5명의 인물은 대등으로서 우지암 회의에 참석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우지암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볼 때 화백 회의는 여러 대등을 대표하는 상대등이 주재하고, 대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다만 우지암 회의에 국왕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혹 국왕이 회의에 참석하면 국왕이 의장이 되고 상대등이 부의장이 된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화백 회의에 국왕이 참석하였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실정이다.

다음으로 알천이 호랑이를 제압하였음에도 여러 참석자들이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위엄에 복종하였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는 우지암 회의 당시 알천이 상대등 지위에 있으면서 상석을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실권이 이미 김유신에게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뜻한다. 특히 김유신이 금관가야 왕의 후손으로 새로이 귀족 세력으로 편입되었음에도 당당히 화백 회의 구성원으로 참석하였다는 점은 화백 회의에 어떠한 질적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지암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고위 관직에 있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런 이들이 김유신의 위상에 눌릴 정도였다면 당시 김유신의 정치적 지위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화백 회의로 여겨지는 우지암 회의에 김유신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이나 참석자들이 상대등인 알천보다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이 회의가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金春秋, 604~661)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화백 회의를 비롯해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꼭대기나 바위 위, 수풀 속 등 신성한 장소에서 개최하는 경향이 강한데, 백제에서 정사암(政事巖)에 모여 나랏일을 논의하였다는 데서도 그러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청송산(靑松山)⋅우지산(于知山)⋅피전(皮田)⋅금강산(金剛山) 등 이른바 4영지(四靈地)에서 나라의 큰일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4곳 가운데 3곳이 산이라는 점에서 신라의 4영지도 기본적으로는 신성성을 띠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중고기의 정치과정시론」,『태동고전연구』4,김영하,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1988.
「신라 화백회의의 인적 구성과 운영」,『신라문화』21,김희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3.
「신라 화백회의의 기능과 성격」,『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상),박남수,간행위원회 편,1992.
「신라 화백회의 연구현황과 중층적 회의구조」,『신라문화』30,박남수,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7.
저서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74.
『신라정치제도사연구』, 이인철, 일지사, 199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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