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삼국의 국제관계

신묘년조 논쟁

백잔(百殘)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屬民)으로 [고구려에] 조공(朝貢)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391)에 건너와 백잔을 공파하고 …신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광개토왕 비문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 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廣開土王碑文」

이 사료는 이른바 신묘년(辛卯年)조 기사로,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발견 이후 학계의 뜨거운 관심이 모아진 구절이다. 사실 「광개토왕비」에 관해서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전기부터 집안(集安) 지역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때는 그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17세기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가 중원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을 시조의 탄생지라고 하여 일반인의 거주를 통제(봉금 정책(封禁政策))했기 때문에 「광개토왕비」는 그 존재마저 잊혀졌다. 그러다 1876년(고종 13) 청나라가 봉금 정책을 해제하여 일반 사람들이 집안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면서 「광개토왕비」가 다시 발견되었다. 1880년(고종 17년) 무렵 집안 지역의 한 농부가 토지를 개간하다가 이를 찾아 낸 것인데, 이후 1883년(고종 20년)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사코 가게아키[酒勾景信] 대위가 묵본(墨本)을 입수해 귀국하면서 학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왜(倭)의 존재였다. 특히 이 사료에 보이는 왜와 백제⋅신라의 상호 관계가 문제였다. 일본 학계에서는 비문을 신묘년(辛卯年, 391년)에 일본의 야마토[大和] 조정이 군대를 파견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하고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을 뿐 아니라, 평양 부근까지 진출해 고구려와 전투하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고대 일본의 남한경영론(南韓經營論)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중요한 논거로 활용하였다. 즉,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핵심적인 근거로 「광개토왕비」를 바라본 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이와 같은 일본 학계의 견해를 반박했다. 정인보(鄭寅普)가 대표적인데, 그의 경우 비문의 주인공이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비문에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추정하였다. 따라서 비문의 주인공을 고구려와 광개토왕으로 상정하고 고구려의 입장에서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해석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남북한의 역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광개토왕 비문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재일(在日)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였다. 그는 비문의 판독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처음 비문을 입수한 사코 대위가 비문의 내용이 일본 측에 유리하도록 사료를 변조하였다는 ‘비문 변조설’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이후 일본은 여러 차례 비문을 조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문 변조를 은폐하기 위하여 비문에 석회를 발랐으므로 현재의 비문은 학술적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비문 변조설은 학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관심을 불러 모았다. 비문의 내용에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고 해석하던 기존의 이해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1년 중국의 왕건군(王健群)이라는 학자가 면밀한 현지 조사를 진행한 결과, 비문의 곳곳에 석회로 보강한 흔적은 있지만, 조직적인 변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문의 변조를 둘러싼 논쟁은 비문의 판독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였고, 이를 계기로 비문을 직접 조사하고 새롭게 판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최근의 이 사료에 대한 연구는 비문에 보이는 한⋅일 양국의 해석이 모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자국에 유리한 해석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을 반성하고, 비문의 전체적인 논리 구조 속에서 이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예컨대 비문은 광개토왕의 업적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므로 반드시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 그대로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그러하다. 이에 따라 이제 이 사료에 보이는 고구려와 백제⋅신라 그리고 왜의 관계는 ‘고구려가 바라본 5세기 동아시아 세계’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견해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박경희 역, 이성시, 삼인, 2001.
편저
『광개토호태왕비연구 100년』(『고구려연구』2), 고구려연구회 편, 학연문화사, 1996.
『영향시민강좌』3(광개토왕릉비 특집호), 일조각 편, 일조각, 1988.
「100년 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 임기환,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편, 푸른역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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