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삼국의 국제관계

백제와 일본의 관계

(앞면)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丙午)의 한낮에 백련철(百練鐵)로 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백병(白兵)을 피하게 하니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가 만든 것이다.

(뒷면)

선세(先世)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百濟王世子)가 갑자기 성음(聖音)이 생기니, 그런 때문에 왜왕(倭王)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므로 후세(後世)에 전하여 보이도록 할 것이다.

「칠지도명문」

(前面)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矦王. □□□□作.

(後面)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七支刀銘文」

이 사료는 고대 한일 관계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칠지도에 관한 내용이다. 칠지도(七支刀)는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는 칼 모양의 철제(鐵製) 의기(儀器)이다. 전체 길이 약 74.9cm로 도신(刀身) 좌우에 3개씩 뿔 모양의 가지가 서로 어긋나게 돋아 있는 형태로, 좌우 뿔 모양 가지와 도신을 합하여 칠지도라고 불린다. 칠지도가 처음 알려진 것은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궁사(宮司)였던 스가 마사토모[管政友]에 의해 칠지도의 칼자루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학계에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칠지도와 그 명문이 알려지면서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은 제작 연대와 누가 그것을 만들어서 주었느냐는 문제였다. 먼저 제작 연대와 관련해서는 칠지도의 표면에 보이는 연호(年號)가 가장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뉘었다. 먼저 표면 첫 부분에 나오는 연호를 ‘태시(泰始)’로 판독한 경우이다. 이를 중국 서진(西晉, 265~316)의 연호로 이해하여 칠지도 제작 연대를 태시 4년, 즉 268년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일제 강점기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조에 전하는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사신 구저(久氐) 등을 통하여 칠지도 1구와 칠자경(七子鏡) 1면 및 각종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는 기사를 방증해 주는 자료라는 입장이다. 이를 통해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사가 실제를 전하는 것이며, 당시 백제는 왜(倭)의 종속국으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료로 활용하였다. 고대 일본이 임나 지역을 200년간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유력한 증거로 본 것이다.

한편, 칠지도의 표면에 새겨진 ‘태□(泰□)’라는 연호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서진의 태시 연호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명문을 자세히 판독한 결과 두 번째 글자가 ‘화(和)’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화(禾)’ 편은 확실하기 때문에 ‘태시’가 아닌 ‘태화(泰和)’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많은 연구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때 ‘태화’를 어느 나라 연호로 볼 것인가는 많은 논란이 있다. ‘태화’를 중국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太和)’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 역시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조에 전하는 기록과 관련하여 나온 주장이다. 해당 기사를 120년 내려서 보아야 한다는 기년 비정에 따르면 이때는 372년이 된다. 이에 따른다면 칠지도는 동진 태화 4년, 즉 369년에 제작되어 3년 뒤인 372년에 왜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칠지도의 헌상 주체가 문제가 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사에 따라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 왜에 헌상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이 시기가 백제가 가장 강성한 시기를 구가했던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대라는 점, 칠지도 표면 ‘후왕(侯王)’ 등의 표현은 일반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길상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음을 보았을 때 백제에서 헌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대치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태화 연호가 동진의 연호가 아닌 백제의 독자적인 연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동진의 연호는 ‘태화(泰和)’가 아닌 ‘태화(太和)’로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와 동진 연호에 사용된 글자가 다르다는 점, 중국에는 ‘태화(泰和)’라는 연호가 쓰인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백제의 독자 연호설이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고고학적 측면에서 칠지도와 친연 관계에 있는 유지(有枝) 철기의 편년이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는 점, 칠지도와 함께 왜국에 보내졌다는 칠자경이 무령왕릉(武零王陵)과 일본에서 출토된 원형경 등의 칠수경(七獸鏡)에 해당된다는 점 등을 통해 6세기 초의 사실이 백제가 일본에 복속하였다는 기원 설화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주장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백제 역시 그러한 개연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백제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경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으며, 또한 『한원(翰苑)』 백제조에 따르면, “그 기년은 별도의 호칭이 없으며, 다만 60갑의 숫자를 차례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있어, 백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칠지도는 고대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명문만이 아니라 제작 기법과 용도 등에 대한 다각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칠지도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백제 칠지도 명문의 재해석」,『한국학보』60,이도학,일지사,1990.
「백제칠지도고」,『진단학보』38,이병도,진단학회,1974.
「백제 칠지도의 의미」,『한국고대사연구』62,주보돈,한국고대사학회,2011.
저서
『초기조일관계연구』, 김석형,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
『고대한일관계사』, 연민수, 혜안, 1998.
편저
「고대 한일 관계사의 민감한 화두,칠지도」, 김태식,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편, 푸른역사, 2004.
「백제의 천하인식」, 이도학, 충남역사문화연구소 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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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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