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통일로 가는 길

백제의 멸망 과정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또한 칙명(勅命)으로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토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6월 18일에 태종무열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서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太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義慈)의 도성(都城)을 깨뜨리고자 한다.”고 하였다. 법민이 말하기를,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大將軍)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하였다. 소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兵馬)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서 소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자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또는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堦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士卒)들은 힘이 다하였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기를,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라고 하였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라고 하고, 곧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左將軍)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관장이 “예!”라고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야!”라고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 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삼군이 그것을 보고 분에 받쳐서 죽을 마음으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날에 정방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정방이 곧 김문영을 풀어 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서 당나라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기 위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갔다.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다. 의자왕의 서자(庶子)가 몸소 좌평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13일에 의자왕이 좌우의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서 몸을 보전하였다. 의자왕의 아들인 융(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융은 땅에 엎드려서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이 항복했음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酒宴)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 및 여러 장수는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당 아래에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 중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붙잡아서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하였기 때문에 목을 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서 [죄목을] 헤아리며 말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에서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서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주둔하면서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26일에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 사비성(泗泌城)에 남아서 지켰는데, 왕자 인태(仁泰)가 사찬(沙湌) 일원(日原), 급찬(級湌)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000명으로써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 2000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이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 적병이 물러가서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서 틈을 엿보아 가며 성읍을 노략질하였는데, 백제 사람들 중에서 배반하여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에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서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勅命)을 전한 후에 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그를 따라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18일에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500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5일에 왕이 계탄(雞灘)을 건너서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는데, 7일에 이겨서 700명의 목을 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서 공을 논하였는데, 계금졸(罽衿卒) 선복(宣服)을 급찬(級湌)으로 삼고, 군사(軍師) 두질(杜迭)을 고간(高干)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 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은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의 직을 맡겼고, 은솔 무수(武守)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대감(大監)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을 맡게 하였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1)伐百濟. 勅王爲嵎夷道行軍摠管使將兵爲之聲援.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 六月十八日㳄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隨流東下. 二十一日王遣太子法敏, 領兵舩一百艘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 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率精兵五萬應之, 王次今突城.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堦伯擁兵而至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謹聞命矣. 乃入陣力戰死.

左將軍品日喚子官狀【一云官昌】, 立於馬前指諸將曰, 吾兒年纔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生致堦伯. 堦伯俾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官狀.

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搴旗者, 非畏死也. 言訖, 以手掬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堦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品日執其首流血濕袂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幸矣. 三軍見之慷慨, 有死志鼓噪進撃, 百濟衆大敗. 堦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是日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到伎伐浦, 遇百濟兵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鞘. 定方右將董寶亮躡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使佐平覺伽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餼豊腆,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 謂前乞罪, 又揮之.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痛心疾首, 今日汝命, 在吾手中. 隆伏地無言.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来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八月二日, 大置酒勞將土. 王與定方及諸將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羣臣, 莫不鳴咽流涕.

是日捕斬毛尺. 毛尺本新羅人, 亡入百濟, 與大耶城黔日同謀陷城, 故斬之. 又捉黔日數曰, 汝在大耶城與毛尺, 謀引百濟之兵, 燒亡倉庫, 令一城乏食致敗罪一也, 逼殺品釋夫妻罪二也, 與百濟來攻本國罪三也. 以四支解, 投其尸於江水.

百濟餘賊據南岑⋅貞峴▣▣▣城. 又佐平正武聚衆, 屯豆尸原嶽, 抄掠唐羅人.

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地嶮不能克, 但攻破小柵.

九月三日郞將劉仁願以兵一萬人留鎭泗沘城, 王子仁泰與沙湌日原級湌吉那, 以兵七千副之. 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百姓一萬二千人, 自泗沘乘舡廻唐. 金仁問與沙湌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

二十三日, 百濟餘賊入泗沘,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擊走之. 賊退上泗沘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禮城, 十八日取其城, 置官守, 百濟二十餘城震懼皆降.

三十日, 攻泗沘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五日, 王行渡雞灘, 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二十二日, 王來自百濟論功, 以罽衿卒宣服爲級湌, 軍師豆迭爲高于, 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許職有差. 百濟人員並量才任用, 佐平忠常⋅常永⋅達率自簡授位一吉湌 充職摠管, 恩率武守授位大奈麻充職大監, 恩率仁守授位大奈麻, 充職弟監.

『三國史記』卷5,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 7年

1)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결각되어 있다.

이 사료는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백제의 멸망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義慈王)조와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전에도 전하고 있다. 이들 내용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대개 『삼국사기』가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기록을 전재한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멸망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후반기의 실정(失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백제본기」 의자왕 15년(655) 이후 왕이 ‘황음탐락(荒淫耽樂)’에 빠져서 정치를 그르치기 시작했다는 기록과 「당평제비(唐平濟碑)」에 왕이 직신(直臣)을 버리고 요부(妖婦)를 믿었다는 기록, 『일본서기(日本書紀)』 제명천황(齊明天皇) 6년조에 군대부인(君大夫人)인 요녀가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현량(賢良)을 주살함으로써 스스로 멸망하였다는 기록들에 근거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의자왕 대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기록들이 단순히 의자왕의 실정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실정 기사는 의자왕 개인의 실정이 아닌 백제 내부의 정치적 변동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의자왕 전반기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는 성충(成忠, ?~656)⋅흥수(興首, ?~?) 등이 왕에게 간하였다가 죽거나 귀양을 간 것으로 전하는 「백제본기」 의자왕 16⋅20년의 기사는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정치 세력의 재편은 곧 백제 내부에서 갈등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으며, 의자왕 후반기 정치⋅사회적 문란이나 백제의 멸망을 암시하는 여러 기사들은 이를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백제의 여러 정치세력들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들어왔을 때 어떻게 방어 태세를 갖출 것인지를 두고 극명하게 대립하였다. 이는 「백제본기」에서 의직(義直, ?~?)과 흥수 등은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에서 나당 연합군의 진군을 막자고 주장하는 반면, 상영(常永, ?~?)을 비롯한 세력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고 시간을 벌면서 전열을 정비하여 나당 연합군을 막을 것을 주장하는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제의 계백(階伯, ?~660)이 이끄는 5000 결사대가 김유신(金庾信, 593~673)의 5만 대군을 황산벌에서 맞아 싸우는 기록은 이러한 백제 내부 정치 세력 간의 의견 대립 와중에 나당 연합군의 상륙과 진격이 이루어지면서 나온 궁여지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공격 외에도 나당 연합군 내부의 갈등 관계도 이 사료에서 읽을 수 있다. 황산벌 전투로 인해 당나라 군과의 약속한 날짜를 어긴 김유신 군에 대해 소정방(蘇定方)이 김문영(金文穎)의 목을 베어 책임을 물으려 하자 김유신이 당나라 군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표명함으로써 일단락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이는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멸망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손을 잡기는 했으나 그 이면에는 서로 다른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이 지역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어 그 관할 하에 두고자 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는 이 지역에 9도독부를 두되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삼국을 포함한 동방 전체를 총괄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기미주 정책은 독립국으로서의 신라의 입지마저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결국 나당 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료를 통해 신라에 의한 백제 유민의 포섭 과정도 알 수 있다.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이 끝난 후 논공(論功) 과정에서 포상 외에 백제에서 투항한 자들을 신라 내부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백제 투항인의 임용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백제 유민의 집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백제인들에 대한 포섭 정책은 이후 고구려 유민을 대하는 사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인들을 포섭함으로써 진정한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의자왕대 정치변동」,『한국고대사연구』5,김수태,한국고대사학회,1992.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동향과 백제멸망」,『백제연구』19,김주성,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88.
「무왕⋅의자왕대 정국운영의 연구」,『한국고대사연구』20,박민경,한국고대사학회,2000.
「7세기 중엽의 동아시아」,『백제연구』23,산미행구,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92.
「백제의 대왜외교」,『백제연구』27,연민수,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97.
「7세기 중엽의 백제와 왜」,『백제연구』27,정효운,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97.
저서
『백제정치사연구』, 노중국, 일조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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