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통일로 가는 길

멸망 이후의 백제

대당평백제국비명

현경(顯慶) 5년(600) 경신(庚申), 8월 15일, 낙주(洛州) 하남(河南)에 건립하고 권회소(權懷素)가 짓다. ……(중략)……

사지절(使持節) 신구우이마한웅진(神丘嵎夷馬韓熊津) 등 14도(十四道) 대총관(大摠管)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은 증성에서 여러 번 모함을 당하고 위수(委水)에서 긴 파란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계획은 무장(武帳)에서 맞추었고 빼어난 기개는 문창성[文昌]에 나타냈으니, 한 무제 때의 흉노를 쳐서 용맹을 날린 위청과 곽거병을 능가하면서도 따라잡지 않으며, 한 고조를 도왔던 팽월과 한신을 굽어보면서도 높게 여긴다. 조운(趙雲)은 일신의 담력으로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 되었고 관우(關羽)는 만인(萬人)을 대적할 만한 능력으로 명성이 백대(百代)에 떨쳤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가지고 유적을 무릅쓰면서도 더욱 더 견고해졌고 목숨을 가벼이 하고 의를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앞장을 섰어도 그 마음을 빼앗기는 어려웠다. 마음은 얼음처럼 투명한 거울에 드러나 있어 귀신도 그 형상을 감출 수 없고, 바탕은 절개를 힘써 바람과 서리도 그 색을 고칠 수 없었다. 사졸을 길러 변방 오랑캐를 어루만짐에 이르러서는 사지(四知)1)를 삼가고 주(酒), 색(色), 재물의 세 가지 유혹[三惑]2)을 물리쳐 빙천(氷泉)을 고요하게 해서 깨끗함을 드러내고 서리 맞은 잣나무를 품고서 정절을 굳게 하니, 말하지 않아도 『시경』⋅『서경』에 부합하고 행하지 않아도 법도에 들어맞는다. 흰 구름을 거느리고서 상쾌함을 함께 하고,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서 고고함을 다투면서도 멀리 앞 사람을 생각하여 모두 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이 있었다. ……(중략)……

부대총관(副大摠管) 좌령군장군(佐領軍將軍) 김인문(金仁問)은 기량이 온화하고 아담하며, 기국과 식견이 침착하고 굳세어서 소인배의 자잘한 행위는 없고 군자의 고매한 풍모만 있었으며, 그의 무(武)는 싸우지 않고도 드러났으며 문(文)도 부드럽고 원대했다. ……(중략)……

그 왕 부여의자 및 태자 융 이외 왕자 (여)효 13인은 대수령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00여 인과 함께 이미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니, 말가죽을 버리게 하고 우차에 실어다가 잠시 있다가 사훈(司勳)에 올리고 이에 청묘(淸廟)에 드렸다. ……(중략)…… 모두 5도독 37주 250현을 두고 호(戶) 24만, 구(口) 620만을 각각 편호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했다. ……(하략)……

「대당평백제국비명」

1)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당신이 알고, 내가 안다는 뜻으로, 비밀은 은폐할 수 없으므로 언행을 삼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후한서』권54 「양진전(楊秉傳)」에서 형주자사(荊州刺史) 양진(楊震)이 왕밀(王密)이 뇌물로 바친 금을 거절하면서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
2)『후한서』권54 「양병전(楊秉傳)」에서 유래되었다. 청렴한 관리였으며 태위(太尉)까지 올랐던 양병(楊秉)은 “나는 세 가지 미혹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술, 여색, 재물이다[我有三不惑:酒,色,財也]”라는 말을 남겼다.

大唐平百濟國碑銘

顯慶五年歲在庚申, 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 建洛州河南, 權懷素書. ……(중략)……

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總官, 左武衛大將軍, 上柱國, 邢國公, 蘇定方, 疊遠構於曾城, 派長瀾□委水, 叶英圖於武帳, 標秀氣於文昌, 架衛霍而不追, 俯彭韓而高視. 趙雲一身之膽, 勇冠三軍, 關羽萬人之敵, 聲雄百代. 捐軀殉國之志, 冒流鏑而逾堅, 輕生重義之心, 蹈前鋒而難奪. 心懸氷鏡, 鬼神無以秘其形, 質邁松筠, 風霜不能改其色. 至於養士卒撫邊夷, 愼四知去三惑, 頋泳泉以表潔, 含霜栢以凝貞, 不言而合詩書, 不行而中規矩. 將白雲而共爽, 與靑松而竸高, 遠懷前人, 咸有慙德. ……(中略)……

副大總管佐領軍將軍金仁問, 氣度溫雅, 器識沉毅, 無小人之細行, 有君子之高風, 武旣止戈, 文亦柔遠. ……(中略)……

其王扶餘義慈及太子隆, 自外王餘孝一十三人, 幷大首領大佐平沙吒千福國辯成以下七百餘人, 旣入重闈, 並就擒獲, 捨之馬革, 載以牛車, 佇薦司勲, 式獻淸廟. ……(中略)…… 凡置五都督, 卅七州, 二百五十縣, 戶廿四萬, 口六百廿萬, 各齊編戶, 咸變夷風. ……(下略)……

「大唐平百濟國碑銘」

이 사료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으로, 660년(의자왕 2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당시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평제비명(唐平濟碑銘)이라고도 한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 제1층의 4면(四面)에 새겨져 있는데,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는 석제 유물이 옛 부여군아(扶餘郡衙)의 부지 내에서 발견되어 「당평제비」가 두 가지였음이 밝혀졌다. 비가 건립된 시기는 660년 백제 멸망 직후이고, 그 성격은 대체로 소정방(蘇定方, 592~667)의 기공비(紀功碑)이며,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과 연합해 백제 사비성(泗泌城)을 함락하고 백제를 멸망시킨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비문에서는 소정방 등 당나라 주요 장군의 직책과 그 활동 및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여러 사실을 전하고 있어 소정방을 비롯한 백제 원정군과 당 황제에 대한 수식(修飾)을 제외하면 7세기 중⋅후반 대 백제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볼 때 주목을 끄는 것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 왕과 왕족⋅귀족들의 동향을 전하는 부분과 백제 멸망 후 백제 지역에 새롭게 실시한 지방 제도 및 그 규모, 당시의 인구수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에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그런데 각각의 사서에 전하는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의 행적을 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에는 측근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갔다 며칠 후에 항복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백제본기」 의자왕조에서는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신당서』에는 태자 융(隆)과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대체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중국 측 사서는 그 내용의 가감은 있으나 동일한 사실을 전하는 데 반해, 「백제본기」는 의자왕과 함께 달아난 태자의 이름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 멸망 당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대당평백제국비명」에서 태자를 융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백제 멸망 당시의 태자는 ‘융’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북쪽 변경 혹은 웅진성으로 달아났다가 소정방에게 잡히는 것으로 기록된 여타의 사서들과는 달리 「대당평백제국비명」에서는 의자왕이 융, 효를 비롯한 왕자 및 귀족들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소 혼란을 주고 있다. 비문이 당대에 쓰였다는 점에서 볼 때 「당평제비명」의 내용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도 있으나 비문의 관련 내용이 소략하다는 점, 이후 소정방이 웅진성 및 사비성에서 사로잡힌 백제의 왕, 왕족 및 귀족들을 모아 함께 당나라로 이송한 점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의 멸망 과정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비문에서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인구 및 군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도 함께 전한다. 백제의 호구(戶口) 수에 대해서는 『구당서』 「백제전(百濟傳)」과 『신당서』 「백제전」 및 『통전(通典)』에는 76만 호로 나온다. 그러나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호 24만, 구 620만”으로 나오고 있고, 『삼국유사』권1 변한(卞韓)⋅백제조에는 “백제가 전성하였을 때에는 15만 2300호”라 나오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대당평백제국비명」에 기록된 호구의 숫자를 비교하여 환산하면 한 호당 구(口)의 숫자가 약 26명으로 호당 평균 구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인구수가 멸망 당시 백제의 인구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인구는 이들 기록에 대한 비교 검토와 함께 당시 농업 생산력 대비 인구 부양력 등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될 때 보다 정확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대당평백제국비명」문제에 대한 고찰」,『충북사학』20,배근흥,충북대학교 사학회,2008.
편저
「당평제비」, 김영심,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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