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통일로 가는 길

백제의 부흥 운동

백제 승려 도침(道琛)과 옛 장수 복신(福信)이 무리를 이끌고 주류성(周留城)에 웅거(雄據)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도침과 복신은) 사신을 보내 왜국(倭國)에 가서 옛 왕자(王子) 부여풍(扶餘豐)을 맞이하고 그를 세워 왕으로 하였다. 그 서부⋅북부의 모든 성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중략)……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고 부르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부르며, 배반하고 도망간 무리를 불러 꾀어 들이니 그 기세가 더욱 커졌다. ……(중략)…… 이때 복신은 일찍부터 그 병권(兵權)을 장악하였는데 부여풍과 더불어 점차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였다. 복신이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굴실(窟室)에 누워 있으며, 장차 부여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를 습격해 죽이기를 도모하였다. 부여풍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덮쳐 죽였다.

『구당서』권199상, 「열전」149상 동이열전 백제전

百濟僧道琛⋅舊將福信率衆據周留城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豐立爲王. 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 ……(中略)…… 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誘叛亡, 其勢益張. ……(中略)…… 時福信旣專其兵權, 與扶餘豐漸相猜貳. 福信稱疾, 臥於窟室, 將候扶餘豐問疾, 謀襲殺之. 扶餘豐覺而率其親信, 掩殺福信.

『舊唐書』卷199上, 「列傳」149上 東夷列傳 百濟傳

이 사료는 백제 부흥 운동과 관련한 내용이다. 백제 부흥 운동에 관한 국내의 사서로는 『삼국사기』가 있고, 일본 측의 사서로는 『일본서기』가 있으며, 금석문 자료로 「당평제비(唐平濟碑)」⋅「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부여융묘지명(扶餘隆墓誌銘)」 등이 있다. 그리고 중국 측 사서로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이 있다. 이 사료는 『구당서』의 것이다.

삼국사기』와 중국 측 사서는 신라 및 당나라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따라서 백제 유민의 시각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전하는 금석문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이와 비교해 『일본서기』의 경우 왜(倭)가 백제 부흥 운동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백제 부흥 운동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수적이며, 『일본서기』를 포함한 여러 사서의 내용을 세밀히 비교⋅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료에 나오듯 백제 부흥 운동의 핵심 인물은 승려 도침(道琛, ?~661)과 장수 복신(福信, ?~663), 그리고 왕자 부여풍(扶餘豐, ?~?)이며, 먼저 주도한 이는 도침과 복신이었다. 사료만으로 부흥 운동의 개시 시점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자치통감』과 「당유인원기공비」를 종합해 보면,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년) 8월 무렵으로 파악된다.

부흥군의 거점은 주류성(周留城)으로 나오는데 그 위치는 명확지 않다. 이에 주류성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1) 충남 서천군 한산면 부근 (2) 전북 정읍시 고부면 두승산성(豆升山城) (3)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乾芝山城) (4) 전북 부안군 상서면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5) 충남 연기군 금의면 일대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당유인원기공비」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부흥 운동이 임존성(任存城)을 거점으로 전개되었다고 한 점으로 미뤄 보면, 복신과 도침은 임존성에서 거병(擧兵)하여 세력을 모으고, 이후 주류성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로써 여러 지역의 부흥 운동 세력이 복신과 도침, 그리고 부여풍을 구심점으로 통합되었다. 부여풍은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의 아들로, 『일본서기』에는 풍장(豊璋)이라고 나온다. 631년(백제 무왕 32년) 일본에 파견되어 있다가 백제가 멸망 후 복신과 도침이 부흥 운동을 도모하자 처자와 숙부 충승(忠勝) 등과 함께 왜군 5000명을 이끌고 귀국하여 부흥 백제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백제 부흥 운동은 정당한 왕위 계승자를 옹립한다는 명분을 얻었을 뿐 아니라 왜의 지원도 얻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복신과 부여풍의 내분으로 백제 부흥 운동은 쇠락하였다. 사실 이보다 앞서 661년 9월~662년 7월 무렵 복신은 도침을 살해하였는데, 복신이 “병권을 오로지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다가 662년 말~663년 초 부여풍이 복신을 견제하며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자 양자의 갈등이 표출되었고, 마침내 부여풍이 복신을 제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풍의 복신 제거는 부흥 운동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부흥 운동에 참여한 많은 세력이 복신과 도침을 믿고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663년 8월 백강(白江) 전투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러 온 왜군이 대패하자 백제 부흥 운동은 더 이상 의지할 세력마저 없어졌고, 9월 나당 연합군에 의해 주류성이 함락되며 그 중심 세력은 무너지고 말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백제 부흥 운동연구』, 김영관, 서경, 2005.
『백제의 역사와 문화』, 김주성⋅유원재, 학연문화사, 1996.
『백제 부흥 운동사』, 노중국, 일조각, 2003.
『백제정치사연구』, 노중국, 일조각, 1998.
『새로 쓰는 백제사』, 이도학, 푸른역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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