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삼국 시대통일로 가는 길

고구려의 부흥 운동

총장(總章) 2년(669)에 고구려민 3만 명을 강회(江淮)와 남산(山南)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 검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장(高藏)의 외손(外孫) 안순(安舜: 안승)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간(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소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안시성(安市城)에서 반란병을 격파하였다. 또한 반란 세력을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구원병 2000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노하(發盧河)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은 다시 군대의 진열을 정비할 수 없게 되었고, 함께 어울려 신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모두 4년 만에 고구려 잔여 세력이 평정되었다.

『신당서』권220, 「열전」145 동이열전 고려전

總章二年, 徙高麗民三萬於江淮⋅山南. 大長鉗牟岑率衆反, 立藏外孫安舜爲王. 詔高偘東州道, 李謹行燕山道, 並爲行軍總管討之, 遣司平太常伯楊昉綏納亡餘. 舜殺鉗牟岑走新羅. 偘徙都護府治遼東州, 破叛兵於安市, 又敗之泉山, 俘新羅援兵二千. 李謹行破之于發盧河, 再戰, 俘馘萬計. 於是平壤痍殘不能軍, 相率奔新羅, 凡四年乃平.

『新唐書』卷220, 「列傳」145 東夷列傳 高麗傳

이 사료는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668년(신라 문무왕 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적지 않은 고구려인은 당나라와 전쟁을 지속하며 저항하였다. 이른바 고구려 부흥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실패하였으나 당나라의 동북아시아 지배 정책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으며, 한편으로 나당 전쟁(羅唐戰爭)과 밀접히 연관되어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부흥 운동이 “모두 4년 만에 평정되었다”라고 한 점으로 미뤄 대체로 673년(문무왕 13년) 말부터 674년(문무왕 14년) 초까지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 운동은 평양성이 함락되고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전개된 것이다. 평양성을 함락한 당나라는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동북아시아 전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했지만 고구려 백성 가운데 당나라에 저항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당나라는 669년(문무왕 9년) 고구려 백성을 당의 황무지로 옮기는 사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성의 저항은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고구려 부흥 운동은 확대되어갔다. 검모잠(劍牟岑 : 또는 겸모잠(鉗牟岑), ?~670)과 안승(安勝, ?~?)은 그 대표적인 세력의 하나였다.

검모잠과 안승은 처음 한성, 즉 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국가 재건을 도모하였다. 이를 후대 금마저(金馬猪, 지금의 익산 지역)의 보덕국(報德國)과 구분해 ‘한성 고구려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 시점은 670년(문무왕 10년) 6월로 나오는데, 이로부터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평양 지역까지 진출하며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의 대당 전쟁은 신라와 연합한 것으로 나당 전쟁의 일부이기도 했다. 예컨대 「신라본기」에는 이를 신라가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중국 측의 사서에서는 고구려가 주된 적으로 나오고 있어서 부흥 운동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부흥 운동은 검모잠과 안승뿐 아니라 고연무(高延武, ?~?)와 같은 고구려의 전직 관료도 참여하였고, 안시성(安市城)을 비롯한 요동 지역의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고연무는 안승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들과 안시성 지역이 연합하지는 못했다. 당나라 군대가 다시 파견되며 압록강 이북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달아나면서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은 황해도⋅경기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적어도 673년 후반까지 저항을 지속하였다. 이 사료에 보이는 발로하(發盧河)는 지금의 임진강 유역으로 당시의 시점이 673년 후반이었던 것이다. 이후 부흥 운동 세력은 신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마치고 이들을 안승과 함께 금마저 지역에 이주시켰다. 그리고 674년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책봉하며 고구려의 명맥을 잇도록 한다고 표방하였다. 하지만 보덕국은 신라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부흥 운동의 남은 세력이 신라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고구려의 재건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나당전쟁 진행과정에 보이는 고구려유민의 대당전쟁」,『사총』46,양병용,고려대학교 사학회,1997.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 운동의 전개」,『역사와 현실』72,이정빈,한국역사연구회,2009.
저서
『삼국통일전쟁사』, 노태돈,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9.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노태돈, 집문당, 2009.
『나당전쟁사 연구』, 서영교, 아세아문화사, 2007.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김영사, 2005.
『신라의 삼국통합연구』, 이호영, 서경문화사, 1997.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편저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의 전개」, 조인성, 동북아역사재단 편, 200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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