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통일 신라와 발해신라의 통일과 국가 체제 정비

문무왕의 호국 정신

대왕(大王)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사(辛巳, 681년)에 붕어(崩御)하니, 유조(遺詔)를 따라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인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2, 「기이」2 문호왕법민

大王御國二十一年, 以永隆二年辛巳崩, 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 王平時常謂智義法師曰, 朕身後願爲護國大龍, 崇奉佛法, 守護邦家. 法師曰, 龍爲畜報何. 王曰, 我厭世間榮華久矣, 若麤報爲畜, 則雅合朕懷矣.

『三國遺事』卷2, 「紀異」2 文虎王法敏

이 사료는 죽어서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호국 정신과 문무왕을 동해 바다에 장사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헌 기록이다.

이 사료에 따르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 삼국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681년에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 바다 속 큰 바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고 하여 그 바위를 대왕바위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삼국사기』권7, 「신라본기」, 문무왕 21년조),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는 문무왕의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삼국유사』권2, 「기이」2, 만파식적).

대왕암은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사적 제158호로 지정). 그런데 이에 대해 그곳은 단순히 화장한 유골을 뿌린 곳으로 무덤이 아니라는 견해와, 인공적으로 만든 해중릉(海中陵)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해중릉이라는 견해에 따르면, 바위에 사방으로 물길이 나 있고 특히 동쪽에서 바다물이 들어와 서쪽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손이 간 것이 분명하며, 안쪽의 널따란 공간 중앙에 있는 대석 아래에 유골을 안치했을 것이라고 한다. 대석 밑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골을 안치한 중앙 지점으로부터 사방으로 물길을 설치한 것은 석가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무왕이 자신이 죽으면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장사 지내 줄 것을 유언한 것은, 죽은 뒤에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倭寇)를 막겠다는 뜻이다. 이에 그 아들인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대왕암에 장사 지내고 가까운 곳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감은사지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분리에 남아 있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어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삼국유사』권2, 만파식적). 또한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은 이곳에서 대왕암을 쳐다보며 절을 하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대왕암이 실제 문무왕의 해중릉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그것이 신라 문무왕의 호국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유적이라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한다. 신라인들은 삼국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죽어서도 호국신이 되어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그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설화를 남긴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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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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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정치변천사연구』, 이명식, 형설출판사, 2003.
편저
『신라문무대왕』, 경주군⋅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경주군,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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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무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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