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통일 신라와 발해신라의 통일과 국가 체제 정비

신문왕 즉위 교서

[신문왕 원년(681) 8월] 16일에 교서를 내렸다.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옛 성인의 아름다운 규범이요, 죄가 있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이다.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과 두텁지 못한 덕으로 숭고한 왕업(王業)을 이어 지킴에,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자리에 들 때까지 중신들과 나라를 평안케 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상중(喪中)에 도성에서 반란이 일어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역적의 우두머리 흠돌(欽突)⋅흥원(興元)⋅진공(眞功) 등은 벼슬이 재능으로 오른 것이 아니요, 실로 은혜로운 특전으로 관직에 오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고 어질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관료들을 업신여겼으며 아래 위 가릴 것 없이 모두 속였다. 날마다 탐욕스러운 뜻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 보이고 포학한 마음을 멋대로 부렸으며,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궁중의 근시들과 서로 결탁하여 화가 안팎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나쁜 무리들이 서로 도와 날짜와 기한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과인이 위로는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조상의 신령스러운 돌보심 덕분에 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서 그 음모가 탄로 나고 말았다. 이는 곧 사람과 신이 함께 배척하는 바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니, 도의를 범하고 풍속을 훼손함에 있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병사들을 끌어 모아 효경(梟獍)같은 무도한 자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더니,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찾아내어 이미 모두 죽여 없애고 3~4일 동안에 죄인의 우두머리들이 소탕되었다. 마지못하여 취한 조치였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하고 부끄러움 마음이야 어찌 한시라도 잊겠는가! 지금은 이미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멀고 가까운 곳에 우려할 것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兵馬)들을 빨리 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신문왕 원년 추8월 16일

[神文王 元年 八月] 十六日, 下敎曰. 賞有㓛者, 往聖之良規, 誅有罪者, 先王之令典. 寡人以眇躬涼德, 嗣守崇基, 廢食忘餐, 晨興晏寢, 庻與股肱, 共寧邦家, 豈圖縗絰之內, 亂起京城. 賊首欽突⋅興元⋅眞㓛等, 位非才進, 職實恩升. 不能克慎始終, 保全富貴, 而乃不仁不義, 作福作威, 侮慢官寮, 欺凌上下. 比日逞其無厭之志, 肆其暴虐之心, 招納凶邪, 交結近竪, 禍通內外, 同惡相資, 剋日定期, 欲行亂逆.

寡人上頼天地之祐, 下蒙宗廟之靈, 欽突等惡積罪盈, 所謀發露. 此乃人神之所共弃, 覆載之所不容, 犯義傷風, 莫斯爲甚. 是以追集兵衆, 欲除梟獍, 或逃竄山谷, 或歸降闕庭. 然尋枝究葉, 並已誅夷, 三四日間, 囚首蕩盡. 事不獲已, 驚動士人, 憂愧之懷, 豈㤀旦夕. 今旣妖徒廓清, 遐邇無虞, 所集兵馬, 冝速放歸, 布告四方, 令知此意.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神文王 元年 秋8月 16日

이 사료는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681년에 즉위한 후 한 달 만인 8월 16일에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 ?~681)이 파진찬(波珍湌) 흥원(興元, ?~681), 대아찬(大阿湌) 진공(眞功, ?~681) 등과 함께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후 내린 교서이다.

삼국 통일 후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은 새로운 통치 체제를 확립할 목적으로 왕권 강화와 제도 개혁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진골 귀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문무왕의 정치 개혁은 기본적으로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기반한 진골 귀족의 세력 약화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진골 세력은 신문왕비(神文王妃)의 아버지인 김흠돌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김흠돌 세력은 진골 귀족으로 삼국 통일 전쟁 당시 군사적으로 크게 활동하며 문무왕 대에 정치와 군사상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통일 후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계를 중심으로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문무왕에게는 큰 위협 세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문무왕은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고, 이에 진골 귀족 세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 또한 상대등 군관을 교체하고 김흠돌의 딸인 왕비를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아내는 등 진골 귀족 세력을 계속 견제하였다. 신문왕의 이러한 압박에 불만을 가진 진골 귀족은 김흠돌을 중심으로 뭉쳐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철저히 응징하였다. 이 교서에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찾아내어 이미 모두 죽여 없애고……”라고 할 정도로 주동자뿐 아니라 말단의 가담자까지도 색출하여 제거하였다. 신문왕이 난에 가담한 사람들을 철저히 숙청하면서 진골 귀족은 그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 뒤 신문왕은 전제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정치 및 군사 등 제도를 정비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신문왕은 반란을 진압한 직후인 681년 10월 시위부(侍衛府)를 개편하여 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보호하는 한편, 중앙 군사 조직 중 국왕의 직속 부대격인 9서당(誓幢)을 정립해 나갔다. 또한 682년(신문왕 2년)에 위화부(位和府)에 2명의 장관을 두고 국학(國學)을 설치하는 등 관료 제도도 개편하면서 이를 토대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고 전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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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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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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