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통일 신라와 발해신라의 통일과 국가 체제 정비

지방 제도의 정비 -9주 5소경

처음에는 고구려⋅백제와 영토의 경계가 개의 이빨처럼 들쭉날쭉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노략하다가 후에 당(唐)나라와 함께 두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평정하여 드디어 9주(九州)를 설치하였다. 본국[신라] 경계 안에 세 주를 설치하였으니, 왕성(王城) 동북쪽 당은포로(唐恩浦路)에 해당하는 곳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고 하였다. 옛 백제국 경계 안에 세 주를 설치하였으니, 백제의 옛 성 북쪽의 웅진구(熊津口)를 웅주(熊州)라 하고,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 옛 고구려 남쪽 경계 안에 세 주를 설치하였으니, 서쪽으로부터 첫째를 한주(漢州)라 하고,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라 하고, 또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9주가 관할하는 군현(郡縣)이 무려 450개였다.【방언의 이른바 향(鄕)부곡(部曲) 등의 세세한 곳은 모두 다 기록하지 않는다.】 신라 영토의 넓이가 이처럼 매우 컸었다.

삼국사기』권34, 「잡지」3, 지리 1

始與高句麗⋅百濟, 地錯犬牙, 或相和親, 或相寇鈔. 後與唐侵滅二邦, 平其土地, 遂置九州. 本國界內, 置三州, 王城東北, 當唐恩浦路曰尙州, 王城南曰良州, 西曰康州. 於故百濟國界, 置三州, 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 次西南曰全州, 次南曰武州. 於故高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九州所管郡縣, 無慮四百五十〈方言所謂鄕⋅部曲等, 雜所不復具錄.〉. 新羅地理之廣袤, 斯爲極矣.

『三國史記』卷34, 「雜誌」3, 地理 1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대에 지방 통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 기본은 주(州)-군(郡)-현(縣)이었고, 세부적으로는 5소경(小京)과 군현, 촌(村), 향(鄕), 부곡(部曲) 등의 행정단위가 있었다. 이 사료는 통일 이후 지방 통치 체제의 개편을 전하는 것으로, 통일 이후 신라의 정치체제 구축과 관련해 주목 받았다.

9주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각 3주씩 편제하였는데, 원래의 신라 지역에 사벌주(沙伐州)⋅삽량주(歃良州)⋅청주(菁州)를, 옛 고구려 지역에 한산주(漢山州)⋅수약주(首若州)⋅하서주(河西州)를, 옛 백제 지역에 웅천주(熊川州)⋅완산주(完山州)⋅무진주(武珍州)를 두었다. 본래 9주라는 명칭은 중국 고대 국가인 하(夏)⋅상(商)⋅주(周) 시대의 지역 구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후 중국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렇게 9주 체제로 편제한 것은 사실상 중국의 9주 체제를 모방한 것으로, 이는 대내적으로 중앙집권적 통치를 마련하여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대외적으로는 천자국인 중국과 다를 바 없는 자주국임을 표방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삼국의 옛 땅에 각 3주씩 지방 구역을 균분한 것은 삼국 통일의 명분을 강조하면서도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포섭⋅융화하려는 포용 정책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통일 후인 665년(문무왕 5년)까지도 신라의 행정구역은 7주까지만 확대되었는데, 이는 지금의 충청남도 일대에 백제 부흥 운동군의 저항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9주가 초로 완비된 것은 685년(신문왕 5년)의 일이었다.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는 9주를 한자식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년) 대에 옛 명칭을 복구시키는 등 각 시기별로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다.

사료상의 명칭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의 한자식 명칭이다. 경덕왕의 지명 개정은 757년의 군현제 강화와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국왕 심의 정치체제를 달성하기 위해 실시한 개혁 정책의 일환이었다. 또한 경덕왕은 758년(경덕왕 17년)에 거의 모든 관청과 관직의 명칭까지 한자식으로 고쳤는데, 이 역시 왕권이 골품제(骨品制)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소경은 옛 고구려 지역에 북원경(北原京)⋅중원경(中原京)을, 옛 백제 지역에 서원경(西原京)⋅남원경(南原京)을, 그리고 옛 가야 지역에 금관경(金官京)을 두었다. 이것은 통일 이후 옛 고구려⋅백제⋅가야 지역의 이질적 문화 요소를 융화시키려 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서, 소경은 점차 지방의 문화적 중심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라의 영토를 중앙과 동서남북의 5방으로 보는 자주적인 천하관이 반영된 것이다.

중앙 정부는 각 지방에 주와 소경은 물론 군현의 행정단위까지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각 주에는 장관으로 처음에는 군주(軍主)⋅총관(摠管)을 파견하였으나, 나중에 도독(都督)이라 개칭하면서 그 성격도 군사적인 것에서 행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소경에는 사신(仕臣) 또는 사대등(使大等)이라는 장관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사대사(仕大舍)의 도움을 받으며 소경 업무를 총괄하였다. 군은 태수(太守), 현은 현령(縣令)이 다스렸는데, 작은 현의 현령은 소수(少守)라고 하였다. 가장 말단의 촌은 자치적인 자연촌을 몇 개씩 묶어 행정촌으로 운영하였으며, 촌주(村主)를 임명하여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삼국사기』지리지의 군현 고찰」,『사학연구』23,방동인,한국사학회,1972.
「신라 오소경의 설치와 서원경」,『호서문화연구』11,양기석,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1993.
「오소경의 위치 및 도시구조에 대한 일고찰」,『중원경과 중앙탑』,윤무병⋅박태우,충주공전 박물관,1992.
「신라 소경고」,『역사학보』35⋅36,임병태,역사학회,1967.
저서
『신라 중원경 연구』, 장준식, 학연문화사, 1998.
편저
『한국고대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노명호 외, 집문당, 2004.
『신라 서원소경 연구』, 양기석 외, 서경문화사, 2001.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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