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寶龜) 3년(문왕
36, 772) 2월) 기묘(己卯)일에 발해 왕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천황(天皇)은 삼가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문안한다. 짐이 선대(先代)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림에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두루 미치기를 생각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온 천하가 화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고 온 천하가 은혜로워 특별한 이웃으로 격의가 없게 되었다. 옛날 고구려의 전성기 때에 그 왕 고무(高武)
9, 727)에 이르러 왕의 선고(先考)인 좌금오위대장군발해군왕(左金吾衛大將軍渤海郡王)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來朝)하여 비로소 조공을 닦았다. 선조께서는 그 참된 마음을 가상히 여겨 총애하여 대우함이 더욱 두터웠다. 왕은 유풍(遺風)을 계승하고 전왕(前王)의 유업(遺業)을 이어 정성스럽게 직공(職貢)을 닦아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내 온 글을 살펴보니 갑자기 부친이 행하던 법식을 고쳐, 날짜 아래에 관품(官品)과 성명을 쓰지 않고 글의 말미에 거짓되어 천손(天孫)임을 참칭하는 칭호를 써 놓았다. 멀리 왕의 뜻을 헤아려 보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으며, 가깝게는 일의 형편을 생각건대 착오일 듯 의심된다. 그러므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손님에 대한 예우를 멈추도록 하였다. 다만 사신 만복(萬福) 등은 전의 허물을 깊이 뉘우치고 왕을 대신하여 사죄하므로 짐이 멀리서 온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뉘우치고 고침을 들어 주었다. 왕은 이 뜻을 모두 알아서 길이 좋은 계획을 생각하라. 고씨의 때에는 병란이 그치지 않아 (우리)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하여 그쪽에서 형제를 칭하였다. 바야흐로 이제 대씨(大氏)는 일찍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한 연고로 함부로 외숙과 생질이라 칭하는데, (그것은) 예(禮)를 잃은 것이다. 뒷날의 사신은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지난날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진실로 우호를 이음이 끝이 없을 것이다. 봄날의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왕은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이러한 마음을 표하고, 아울러 별도와 같이 물건을 보낸다”라고 하였다.
'문왕' 관련자료
고구려 영류왕
는 조상 대대로 바다 밖에 있으면서 형제와 같이 친하고 군신(君臣)과 같이 의로워,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조공(朝貢)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말기가 되어 고씨(高氏)가 망한 이래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신구(神龜) 4년(무왕
'무왕' 관련자료
『속일본기』권32, 보구 3년 2월(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