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통일 신라와 발해발해의 건국과 발전

발해 중대성에서 일본 태정관에게 보낸 문서

발해국 중대성(中臺省)이 일본국 태정관(太政官)에 첩(牒)을 올립니다.

귀국에 가서 알현할 사신 정당성(政堂省) 좌윤(左尹) 하복연(賀福延)과 그 일행 105명을 마땅히 파견합니다.

사두(使頭) 1명, 정당성 좌윤 하복연

사사(嗣使) 1명, 왕보장(王寶璋)

판관(判官) 2명, 고문훤(高文暄)⋅오효신(烏孝順)

녹사(錄事) 3명, 고문선(高文宣)⋅고평신(高平信)⋅안관희(安寬喜)

역어(譯語) 2명, 계헌수(季憲壽)⋅고응순(高應順)

사생(史生) 2명, 왕록승(王祿昇)⋅이조청(李朝淸)

천문생(天文生) 1명, 진승당(晉昇堂)

대수령(大首領) 65명

초공(梢工) 28명

첩을 보냅니다. 처분을 받고자 합니다.일역(日域)은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양(遼陽)은 서쪽으로 막혀 있으니, 양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1만 리나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남쪽의 큰 바닷물은 하늘을 넘칠 정도라서 바람과 구름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비추면 항해의 길이 혹시나 쉽게 드러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과거와 같이 귀국과의 절친함을 두터이 하고자 하려는 뜻을 삼가 알현하여 마땅히 아뢰고자 합니다. 항해할 때마다 미리 바람을 점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알현하였습니다.

비록 사신 파견의 연한이 12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그 동안 사신의 행차는 여전히 통하여 편지를 주어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 지금까지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옛 원칙을 지켜서 삼가 알현의 예를 닦고자 합니다.

이에 삼가 정당성 좌윤 하복연을 보내 귀국에 가서 배알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에 따라 일본국 태정관에 첩을 올리는 것입니다. 삼가 기록하여 첩을 올립니다. 삼가 첩을 보냅니다.

함화(咸和) 11년 윤9월 25일에 첩을 보냅니다.

오질대부(吳祑大夫) 정당성(政堂省) 춘부경(春部卿) 상중랑장(上中郞將) 상계장(上桂將) 문리현의개국남({冂+弓}理縣擬開國男) 하수겸(賀守謙) 중대친공(中臺親公) 대내상(大內相) 겸전중령(兼殿中令) 안풍현개국공(安豊縣開國公) 대건황(大虔晃)

함화 11년(841) 중대성첩 사본

渤海牒狀幷返牒【承和九年】

渤海國中臺省 牒上 日本國太政官

應差入覲 貴國使政堂省左允賀福延幷行從壹伯伍人

一人使頭 政堂省左允賀福延

二人嗣使 王寶璋

二人判官 高文暄⋅烏孝順

三人錄事 高文宣⋅高平信⋅安寬喜

二人譯語 季(李)憲壽⋅高應順

二人史生 王祿昇⋅李朝淸

一人天文生 晉昇堂

六十五人大首領

廿八人{木+(小/耳)}工

牒奉處分日城東遙遼陽西阻兩方相去万里有餘溟漲

滔天風雲雖可難測扶光出地程途亦或易標所以展新舊

意拜覲須申航海以占風長候時而入覲年祀雖限星

軺尙通賚書遣使爰至干令宜遵舊章欽修覲禮謹差

政堂省左允賀福延命覲貴國者准狀牒上日本國太政官者

謹錄牒上謹牒

咸和 十一年 閏九月 廿五日 牒

吳祑大夫政堂春部卿上中郞將上桂將{冂*弓}理縣擬開國男賀守

謙中臺親公大內相兼殿中安豊縣開國公大虔日光

咸和 11年 中臺省牒 寫本

이 사료는 841년(발해 대이진 11년, 신라 문성왕 3년) 겨울, 발해의 중대성(中臺省)에서 사신단을 통해 일본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문서이다. 이를 「중대성첩」이라 하는데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권11과 『유취국사(類聚國史)』권194에 남아 있다. 당시 발해와 일본 사이에 오가던 외교문서 체제를 보여 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중대성첩」 사본은 원래 일본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에서 소장하고 있는 『임생가문서(壬生家文書)』 『고왕래소식잡잡(古往來消息雜雜)』 2권 중 제1권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1950년 같은 곳에서 간행된 『도서료전적해제(圖書寮典籍解題)』 역사편 앞부분에 사진이 게재되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문서 크기는 세로 29㎝, 가로 48.8㎝로, 종이는 엷은 흑색의 숙지(宿紙)에 단번에 써 내려갔으며 도장은 찍혀 있지 않다. 서체로 보아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에 필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서를 소장했던 임생가(壬生家)는 전통 시대 문서류의 수집, 관리를 책임지던 가문이었기 때문에 이 문서를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뒷면의 내용으로 보아 원래는 이 첩(牒)에 대한 답첩(答牒)도 필사되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문서에 따르면, 841년 발해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은 대사(大使) 하복연(賀福延)과 일행 105명으로 구성된 총 106명의 사절단이다. 이들은 841년 겨울에 발해를 출발하여 12월 22일에 일본 장문국(長門國)에 도착했고, 이듬해 4월에 귀국하였다.

중대성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맨 앞 단락에는 발해국 중대성이 일본국 태정관에게 보내는 것임을 밝히고, 이어 일본에 파견되는 사신의 이름과 직명 및 인원수를 기록하였다. 또한 함께 수행하는 대수령(大首領)과 선원인 초공(梢工)의 수도 기록하였다. 다음으로 둘째 단락에서는 사신을 파견하는 목적 등 외교상 의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발송 일자와 함께 관련 기관과 인물을 명시했는데, 문서의 발송자는 정당성 장관인 하수겸(賀守謙)과 당시 왕의 동생인 대건황(大虔晃, 재위 857~871)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서의 내용을 통하여 「중대성첩」은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 이름과 직명, 규모를 일본의 태정관에 알리는 게 주요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의 동생인 대건황이 대일본 외교에 깊이 관여하고, 「중대성첩」과 태정관첩을 공식적으로 교환하는 외교 절차가 확립된 것으로 미루어 일본에 대한 발해의 외교적 위상이 높았으며 그 절차 역시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이 밖에도 동궁제(東宮制), 수령제(首領制)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 있어서, 발해의 관제(官制)나 지방 행정 제도 등에 대해서도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중대성첩」의 문장 형식은 마치 신하인 발해가 임금인 일본에게 아뢰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9세기에 발해국이 일본에 조공한 부용국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발해가 선왕(宣王, 재위 818~830) 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린 강국이었다는 점에서 실제로 그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그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를 새롭게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의 입장을 고려한 명분상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8세기 중엽 발해⋅신라⋅일본의 관계-일본의 신라침공계획을 중심으로-」,『한일관계사연구』10,구난희,한일관계사학회,1999.
저서
『발해정치외교사』, 김종복, 일지사, 2009.
『발해의 대일본외교 연구』, 박진숙,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발해정치사연구』, 송기호, 일조각, 1995.
『발해의 지배세력연구』, 임상선, 신서원, 1999.
『발해의 대외관계사』, 한규철, 신서원, 1994.
편저
『발해대외관계사 자료 연구』, 장재진 외, 동북아역사재단, 2011.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Ⅲ,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관련 이미지

발해 중대성첩(사본)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