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국(北國)
발해(渤海)를 지칭
이 윗자리에 위치하는 것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신 모는 아뢰나이다. 신이 본국 숙위원(宿衛院) 장보(狀報)를 보니, 지난 건녕(乾寧) 4년(효공왕 1, 897년) 7월 중에 발해 하정사(賀正使)인 왕자 대봉예(大封裔)가 장(狀)을 올려, 발해가 신라 위에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삼가 이에 대한 칙지(勅旨)를 받들건대, “국명(國名)의 선후는 본래 강약에 의해서 따져 칭하는 것이 아니다. 조제(朝制)의 등위(等威)를 어찌 성쇠(盛衰)로 고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구례(舊例)대로 할 것이니 이에 선시(宣示)를 따르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조정의 반열을 바로잡아 주심에 적신(積薪)
원로(元老)를 무시하고 신진(新進)을 우대하는 것
의 근심이 이미 사라졌지만 집목(集木)
매사에 조심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짐을 의미
의 근심은 도리어 절실해지기만 합니다. 생각건대 하늘만은 심정을 아실 것이니 어느 곳에 몸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사(中謝)1)
1)
중사(中謝) : 『통감(通鑑)』 당무종기(唐武宗紀)에 따르면 임금에게 올리는 표문(表文) 중 ‘참으로 황송하고 두려우매 머리 조아리옵니다.’라는 의미의 ‘誠惶誠懼頓首頓首(성황성구돈수돈수)’ 8자를 쓴 것을 베껴 쓰는 경우에 이를 생략하는 표시이다.
신이 듣건대, 『예기(禮記)』에서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은 바로 부허(浮虛)
마음이 들뜨고 허황됨
를 경계하기 위함이요, 『서경(書經)』에서 그 법도를 조심하면 행할 수 있다고 칭한 것은 오직 참월(僭越)
분수에 지나침
을 막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진실로 그 분수를 좇지 않으면 끝내 스스로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는 본디 쓸데없는 부락으로 앙갈(鞅鞨)
등은 무후(武后)께서 다스리실 때 영주(營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도주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고는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칭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고구려의 유신(遺燼)
말갈(靺鞨)의 오기로 추정
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성하여 무리가 이루어지자 이에 속말(粟末)이라는 작은 나라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이들은) 고구려 유민을 따라 강제로 내지(內地)로 옮겨졌는데,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걸사비우)⋅대조영(大祚榮)
'대조영(大祚榮)' 관련자료
유민(遺民)을 지칭
과 물길(勿吉)의 잡류(雜流)가 있었는데, 백산(白山)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로 강도짓을 하는가 하면 흑수(黑水)에서 사납게 구는 것을 의리처럼 여기며 기승을 부리고는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란과 합쳐 악행을 조장하다가 이어 돌궐과 공모하였는데, 평안한 세상에서 여러 번 요수(遼水)를 건너는 사신을 막았으며, 10년 동안 반기를 들고서야 뒤늦게 중국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습니다. 처음 그들이 거처할 고을을 세울 적에 와서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추장(酋長) 대조영
이 신의 나라로부터 제5품(品) 벼슬인 대아찬(大阿餐)을 처음 받았습니다. 이후 선천(先天) 2년(신라 성덕왕 12, 713)에 이르러서 비로소 대조(大朝)
'대조영' 관련자료
당나라를 지칭
의 총명(寵命)을 받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런데) 이후 점차 황은(皇恩)을 입게 되자 어느새 신의 나라와 대등한 예로 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강후(絳侯)⋅관영(灌嬰)과 같은 줄에 서게 된 것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염파(廉頗)⋅인상여(藺相如)가 서로 화목했던 것을 경계(警戒)로 삼았습니다. 발해는 도태한 사력(沙礫)
순금을 거르고 남은 모래와 자갈
과 같은 존재로 (본국과는) 구름과 진흙처럼 현격하게 구분됩니다. (하지만) 삼가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직 위를 범하기만 도모하였습니다. (그들은) 소꼬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용의 머리가 되고자 망령되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어찌 격좌(隔座)
상피(相避) 관계에 있는 사람의 자리를 떨어지게 하여 피혐(避嫌)하는 것
의 의례에 얽매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실로 그들이 강계(降階)
주인이 손님을 영접할 때, 손님이 겸양해 주인을 대우하는 것
의 예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높은 데 계시면서도 매사에 주의하시어 분명히 주위를 내다보고 계십니다. 신의 나라의 천리마가 혹 여위었어도 일컬을 만하여, 소가 비록 수척해졌어도 겁을 줄 만하지 않느냐고 생각하셨습니다. (반면에) 저 오랑캐의 매는 배가 부르면 높이 날아가고, 쥐는 몸집이 있으되 방자히 탐욕만 낸다고 여기시어 함께 중국에 와서 조회하는 것은 허락하시되, 등위가 바뀌는 것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노부(魯府)
노나라의 장부(長府), 옛 관례를 지키는 것을 의미
를 예전 그대로 쓰게 된 것을 듣게 됨에 주(周)나라의 천명이 다시 새롭게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명위(名位)가 같지 않으매 등급이 엄연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의 나라는 진관(秦官)의 극품(極品)을 받은 데 비해, 저 번국(蕃國)은 『주례(周禮)』의 하경(夏卿)을 임시로 받았을 뿐인데, 근래 선조(先朝)에 이르러 갑자기 우대의 은총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지만) 융적(戎狄)은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요(堯)⋅순(舜)도 오히려 이에는 골치를 앓으셨던 것입니다. 끝내 등국(滕國)이 쟁장(爭長)했던 일을 끄집어내어 갈왕(葛王)의 웃음거리를 스스로 취하였으니, 만일 황제 폐하께서 홀로 결단을 내려 신필(神筆)로 거부하는 비답을 내리시지 않았던들 근화향(槿花鄕)
무궁화가 많이 나는 땅이라는 의미로, 신라를 말함
의 염치와 겸양은 스스로 시들해지고 호시국(楛矢國)
호시(楛矢)는 고구려, 숙신(肅愼)의 싸리나무 화살이므로, 호시국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말함
의 독기가 더욱 성할 뻔하였습니다. 이제 멀리 남월(南越)을 평안케 한 한(漢) 문제(文帝)의 깊은 뜻이 봄같이 무르녹고, 동조(東曹)를 없애라는 요청에 대한 위(魏) 태조(太祖)의 아름다운 답변을 똑같이 일러 주시었으니, 이로부터 먼 변방에 조급히 구하는 희망을 끊어 버리고 만방(萬邦)에 망동(妄動)하는 무리가 없어져 확실히 성립된 규정을 지키며 조용히 분쟁이 사라질 것입니다.
신은 삼가 바다 한쪽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있는 몸이어서 달려가 천조(天朝)를 배알하지 못합니다.
『최문창후문집』권1, 사불허북국거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