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통일 신라와 발해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

왕위쟁탈에서 패배한 무열왕계 -김주원

김주원(金周元). 태종왕(太宗王: 태종무열왕)의 손자이다. 당초에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족자(族子)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敬信)이 여러 사람을 위협해 스스로 왕이 되고는 먼저 왕궁에 들어가서 정사를 행했다. 주원은 화(禍)를 두려워하여 명주(溟州)로 물러가 머무르며 끝내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후 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의 속현(屬縣)인 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울진(蔚珍) 등의 고을을 떼어서 식읍(食邑)으로 만들게 하였다. 자손이 이에 따라서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卷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인물

金周元. 太宗王之孫. 初宣德王薨, 無嗣, 群臣奉貞懿太后之敎, 立周元爲王. 族子上大長等敬信, 劫衆自立, 先入宮稱制. 周元懼禍, 退居溟州, 遂不朝請. 後二年, 封周元爲溟州郡王, 割溟州翼領⋅三陟⋅斤乙於⋅蔚珍等, 官爲食邑. 子孫因以府爲鄕.

『新增東國輿地勝覽』卷44 「江原道」 江陵大都護府 人物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을 시해하고 정변에 성공하여 보위에 올랐지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이 죽었다. 이에 김주원(金周元)이 후보로 추천되었는데, 그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 629~694)의 자손이며 중대 무열왕계 직계후손이 끊어진 후 가장 강력한 왕위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물왕/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12세손인 김경신(金敬信 : 원성왕)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로 낙향하여 세력을 이루었다. 이에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고 명주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이 사료는 이러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신라 하대 지배층의 동요와 호족(豪族)의 등장 배경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주목 받아 왔다.

보통 식읍은 일정 지역 내의 일부 토지로 한정되었지만, 사료에 따르면 김주원의 경우 명주 관할의 익령현(翼嶺縣, 강원도 양양)⋅삼척군⋅근을어군(斤乙於郡,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울진군 등 여러 군현에 걸쳐 있었다. 김주원 세력은 이러한 식읍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명주 지역에 성(城)을 쌓아 치소(治所)를 마련하였다. 이 일대는 ‘명주군국(溟州郡國)’이라 불렸으며, 명주군왕은 독자적인 통치 조직과 군사 기반을 가지고 독립된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특수 구역의 관리자적 지위는 김주원의 자손이 계속 보유해 갔다.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金宗基)는 명주군왕, 김종기의 아들 김정여(金貞茹)는 명원공(溟源公)으로 책봉되었고, 김정여의 아들 김양(金陽, 808~857)은 명원군왕(溟源郡王)으로 추봉(追封)된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본래 명주는 김주원의 장원(莊園)이 있었고, 그의 친족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렇게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독자 세력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를 실질적인 최초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김주원 가계의 자손 중 명주에 계속 거주한 이들은 대부분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 세력으로 남았으며, 그 중에는 김주원의 자손인 김순식(金順式)과 같이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우고 세력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명주군왕의 작위와 특권은 김주원계의 분지화(分枝化)를 초래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계였지만 이례적으로 혜공왕 말년 반왕파(反王派)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신은 명주로 은퇴하였어도 옛 공을 인정받아 그 후손들은 중앙 정부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하대 왕권을 획득한 원성왕계는 이처럼 태종무열왕계를 정치에 참여시켜 정변의 합법성을 보장받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아들인 김종기와 김헌창(金憲昌, ?~822), 손자 김장여(金璋如) 등은 일시적이지만 시중(侍中)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헌창은 결국 웅천주 도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한 것은 불법이라 주장하면서 822년(헌덕왕 14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이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얻고자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명주군왕의 작위는 김주원의 직계 자손에게 계속 주어졌다. 따라서 여기서 배제된 방계의 혈족들은 잠재적으로 보다 나은 지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명주군왕의 자손을 우대한다는 명분 아래 조정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원성왕계의 왕위 계승 쟁탈전에 휘말려 중앙의 요직에서 밀려난 경험 역시 반발 심리를 자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헌창은 807년(애장왕 8년) 시중이 되고 중앙의 실력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상대등 김언승(金彦昇)이 반란을 일으켜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으로 즉위하면서 다음 해 정월 시중에서 밀려났다. 814년(헌덕왕 6년) 정월에도 잠시 시중을 지냈으나 이후 무진주 도독, 청주 도독 등 지방관의 자리를 전전하게 되었다.

김주원의 왕위 쟁탈전 패배와 명주군왕 세력의 성립, 그 뒤를 잇는 김헌창의 난은 중대 신라 귀족 간의 연대를 파괴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또한 김주원 세력이 고향을 근거지로 세력을 이루었다는 점, 그 아들 김헌창이 웅천주 도독으로서 지방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을 동요시키고 이들이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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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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