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왕조의)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대산군 태수(大山郡太守)로 나갔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여왕 7, 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兵部侍郎)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이때 최치원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렸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최치원이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언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중략)……
최치원이 서쪽에서 당나라를 섬기다가 동쪽의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하여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면서 스스로 위로하였고, 산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 예컨대 경주
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冰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合浦縣)의 별장[別墅] 등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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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수도하는 벗
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삼국사기
'삼국사기'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