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甄萱)
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李氏)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견훤
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 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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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우뚝 뛰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커서 보통이 아니었다. 군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 해안을 지키러 갔을 때에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그의 용기는 항상 병졸보다 앞섰으므로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 즉 신라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892)에 왕의 총애를 받던 아이들이 (왕의) 옆에 있으면서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고, 그 위에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
은 은근히 왕위를 엿보는 마음을 가져 무리를 불러 모아 왕경(王京)의 서남쪽 주(州)와 현(縣)을 치자 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한 달 사이에 무리가 5000명에 이르자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이 가장 강성하여 궁예
가 스스로 투항하여 그 부하가 되었는데, 견훤
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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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이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그 백성이 환영하고 위로하였다. 견훤
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에게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
가 발흥하였으므로 진한과 변한이 따라서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어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의 요청을 들어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 명을 싣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잃은 영토를 다시 찾기 위해 황산(黃山)을 지나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내 이제 감히 완산(完山)에 도읍하여 의자왕(義慈王)의 묵은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후백제 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마련하니, 이때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고,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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