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고려 시대통치 체제의 정비

향⋅소⋅부곡⋅장⋅처에 관한 자료

방근곡처(防斤谷處) 【주 남쪽 30리에 있다.】 신제처(新堤處) 【주 서쪽 15리에 있다.】 신잉이소(新仍伊所) 【주 서쪽 15리에 있다.】 등신장(登神莊) 【천녕현 동쪽 20리에 있다.】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에서 주군(州郡)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 호구(戶口)가 현의 규모가 되지 못하는 곳에는 향(鄕)이나 부곡(部曲)을 두어 소재지의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주소(紬所)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곽소(藿所)자기소(瓷器所)어량소(魚梁所)강소(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건을 공급하였다.

또 처(處)나 장(莊)으로 칭하는 것도 있어, 각 궁전(宮殿)⋅사원(寺院) 및 내장댁(內莊宅)에 분속되어 그 세를 바쳤다. 위 여러 소(所)에는 모두 토성(土姓)의 아전과 백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7 「경기」2 여주목 고적

防斤谷處,【在州南三十里】, 新堤處,【在州西十五里】, 新仍伊所,【在州西十五里】, 登神莊,【在川寧東二十里.】

今按新羅建置州郡時, 其田丁戶口, 未堪爲縣者, 或置鄕, 或置部曲屬于所在之邑. 高麗時, 又有稱所者, 有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塩所⋅墨所⋅藿所⋅甆器所⋅魚梁所⋅薑所之别, 而各供其物.

又有稱處者, 又有稱莊者, 分隷于各宫殿寺院及內莊宅, 以輸其稅. 右諸所皆有土姓吏民焉.

『新增東國輿地勝覽』卷7 「京畿」2 驪州牧 古蹟

이 사료는 여주목에 있었던 등신장(登神莊)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려 시대 특수 행정구역으로 편제된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의 설치 기원과 그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는 기본 지방 행정단위로 군현제도를 운영하였는데, 군현으로 편제할 수 없는 곳은 부곡 등으로 편제하였다. 먼저 위의 기록에 보이는 부곡을 보자. 부곡은 이미 신라 때부터 있었으며, 전정이나 호구가 적어 현이 되지 못하는 곳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983년(성종 2년) 6월 전지(田地) 지급 기록을 보면, 부곡은 1000정 이상부터 50정 이하까지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어 신라 시대와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시대 부곡의 발생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먼저 전쟁 포로의 집단적 수용 지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래에는 집단 천민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본래 군현이었다가 반란⋅전쟁 때 투항이나 반인륜 범죄 등으로 인해 읍격(邑格)이 떨어져 생긴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고려 초 군현 재편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위상이 낮거나 지리적⋅사회 경제적 여건이 나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 보는 시각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고려의 부곡민은 농사를 지으면서 국가에 대한 조세와 역을 부담하고 있었으므로 천민 집단이 아닌 양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는 고려 시대에 처음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금⋅은⋅동⋅철⋅실⋅탄⋅소금⋅종이⋅콩⋅생강⋅묵⋅자기⋅기와 등의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특정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는 왕실 및 국가에서 요구하는 특정 공납품을 생산했다고 볼 수 있다. 민의 성격에 대해서도 기존의 경우 천민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하지만 위의 기록처럼 여러 에 토성과 아전, 백성 등이 있었다고 한 점으로 볼 때, 현재는 특정인들이 집단적으로 공납품을 생산하는 역이 있을 뿐이고 신분은 양인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장⋅처는 왕실⋅궁원⋅사원⋅내장택에 속한 특수한 장원에 해당하였다. 왕실 등은 장⋅처에 대해 일정 분량의 수취를 행사하였는데, 장원 단위로서가 아닌 지방 행정 제도의 한 축을 이루고 있어 고려 시대의 특수한 면이 드러나고 있다.

결국 등신장조에 첨부되어 소개되고 있는 부곡⋅장⋅처에 대한 설명은 신라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운영된 특수 지방 행정단위의 종류와 성격, 해당 지역민의 신분과 위상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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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노인(奴人)과 부곡」,『한국고대사연구』43,박종기,한국고대사학회,2006.
「고려 수공업소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검토」,『한국사론』41⋅42합,서성호,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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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장⋅처에 대한 재고-왕실의 장⋅처를 중심으로-」,『진단학보』64,이상선,진단학회,1987.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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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자율의 공간 : 고려의 지방사회』, 박종기, 푸른역사, 2002.
『한국중세 부곡 연구』, 이홍두, 혜안, 2006.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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