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고려 시대관리 등용 제도

음서 제도

인종(仁宗) 5년 2월에 결정하여 양자로 거둔 같은 집안의 지자(支子)에게 음직(蔭職)을 계승함을 허락하였다. 버려진 어린아이를 수양하여 양인(良人)인지 천인(賤人)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자는 동⋅서⋅남반을 모두 5품으로 한정(限定)하게 하였다. 12년 6월에 결정하여 나이 70이 되어 사직하였거나 현임(現任)인 재신(宰臣)의 친아들은 군기주부동정(軍器主簿同正)으로 하고 수양아들 및 내외손(內外孫)과 생질(甥姪)은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으로 하였다. 전대(前代) 재신(宰臣)의 친아들은 양온령동정으로 하고 내외손은 영사동정(令史同正)으로 하였다. 추밀원(樞密院)의 친아들은 양온령동정으로 하고 수양아들 및 내외손과 생질은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으로 하였다. 좌우 복야(左右僕射)와 6상서(尙書) 이하 문무(文武) 정3품의 친아들은 양온령동정으로 하고, 수양아들 및 내외손과 생질은 주사동정(主事同正)으로 하였다. 종3품의 친아들은 양온령동정으로 하고 수양아들 및 내외손과 생질은 영사동정으로 하였다. 정⋅종4품의 친아들은 양온승동정으로 하고 정⋅종5품의 친아들은 주사동정으로 하였다.

『고려사』권75, 「지」29 [선거3] 전주 범음서

○仁宗五年二月判, 收養同宗支子, 許承蔭. 收養遺棄小兒, 良賤難辨者, 東西南班, 並限五品. 十二年六月判, 致仕見任宰臣直子, 軍器注簿同正, 收養子及內外孫甥姪, 良醞令同正. 前代宰臣直子, 良醞令同正, 內外孫, 令史同正. 樞密院直子, 良醞令同正, 收養子, 及內外孫甥姪, 良醞丞同正. 左右僕射六尙書以下文武正三品直子, 良醞令同正, 收養子及內外孫甥姪, 主事同正. 從三品直子, 良醞令同正, 收養子及內外孫甥姪, 令史同正. 正從四品直子, 良醞丞同正, 正從五品直子, 主事同正.

『高麗史』卷75, 「志」29 [選擧3] 銓注凡蔭敍

이 사료는 1127년(인종 5) 2월과 1134년(인종 12) 6월 음서 제도(蔭敍制度)를 재정비하면서 탁음자(托蔭者)에 따라 자손들에게 어떠한 관직을 처음으로 줄 것인가를 정한 규정이다. 고려 시대 탁음자의 범위, 그에 따른 자손의 관직 등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어 음서제 운영에 따라 문벌 귀족 사회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음서제문음(門蔭) 혹은 공음(功蔭)이라고도 하였다. 대체로 가문에 기준을 두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공과 지위에 따라 자손을 관리로 임용하는 방식이었다. 고려의 관료 선발 방식은 광종(光宗, 925~975, 재위 949~975) 대 이래 과거 시험을 통한 등용을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관인이나 공신이 늘어나면서 이 같은 방식으로는 그들의 자손 중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신라에서 국가에 공을 세운 이들의 자손을 관직에 임명한 바가 있었다. 고려는 이러한 방식을 더욱 확대하고, 이를 제도화하였다. 일정 지위와 공이 있는 자의 자손에 대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현직 고위 관료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난 자에 대한 우대를 행하였던 것이다.

음서제의 규정은 국초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해 18세 이상 된 자는 조상의 공로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목종(穆宗, 980~1009, 재위 997~1009)은 즉위하면서 문무 5품 이상 관원의 아들에게 음직(蔭職)을 주도록 정하였다. 1014년(현종 5) 12월에는 그 범위가 보다 넓어졌다. 양반으로 현직 5품 이상의 자손이나 아우, 혹은 조카도 1인에 한해 벼슬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이 음서에 해당하는 대상은 점차 폭넓어졌고, 이는 가문에서 관료를 지속적으로 배출시킴으로써 세습적 문벌 귀족 가문을 형성하는 데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다만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종(仁宗, 1109~1146, 재위 1122~1146)음서를 받는 수음자들의 관직이 정해지기 전까지 음관(蔭官)에 관한 규정은 미흡했던 듯하다.

음서를 베푸는 시기는 포상이나 특사처럼 비정기적인 면이 있었다. 예컨대 국왕의 즉위나 왕태후 및 왕태자의 책봉, 태묘에서의 국왕 친제, 가뭄 발생에 대한 대책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이와 달리 고려의 정기 인사가 행해지는 매년 12월 도목정(都目政) 때 음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서 제도에 대한 대폭적인 정비가 이루어진 것이 위의 사료에 보이는 규정이었다. 탁음자를 새롭게 규정하고 수음자의 범위와 그들의 첫 음직인 초음직(初蔭職)을 정하였던 것이다. 먼저 1127년(인종 5) 2월 규정에서는 개경서경의 문무 5품 이상의 관료를 대상으로 아들 한 명의 음관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친자가 없는 경우에는 수양자 및 손자도 음서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여기에는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 ?~116)이 난을 일으켜 귀족 사회가 크게 동요했기 때문에 이를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132년(인종 12) 6월의 결정 사항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탁음자에는 치사 및 현임 재신, 전대(前代)의 재신, 추밀원, 좌우 복야와 6상서 이하 문무 정⋅종3품, 정⋅종4품, 정⋅종5품 등이 해당되었다. 대상이 되는 범위로는 직자(直子)⋅수양자(收養子)⋅내외손⋅생질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준하여 내려진 초음직과 그 품계를 보면 이속에 해당하는 영사동정(令史同正)으로부터 주사동정, 정9품의 양온승동정, 정8품의 양온령동정, 군기주보동정에 이르기까지 폭넓었다. 이 같은 규정에서 초음직이 대부분 이속(吏屬)의 동정과 품관 동정(品官同正)으로 나눠졌다는 것은 매우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규정과 달리 초음직을 받은 자들 중에는 권무직(權務職)과 품관 실직(品官實職)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는 자들은 때로 10세 미만 혹은 15세를 전후한 나이에도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미 관직에 있는 자라도 그 혜택을 받아 직급이 올라갔다. 음서 출신자라도 과거 출신자들처럼 5품 이상의 직에 오를 수 있었다. 제약이 없었거나 약했던 것이다. 또 음서로 출사한 자의 50~60%가 재상으로까지 올랐다는 분석을 토대로 살펴본다면 음서 출신자의 후손은 다시 음서를 통해 음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들을 놓고 볼 때, 위의 사료에 나타난 고려 시대의 음서 제도는 탁음자가 정⋅종5품으로부터 시작하여 치사 및 현임의 재신에까지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처음 받는 음직은 이속부터 정8품에 이르기까지 동정직을 위주로 하였으며, 권무 및 실직 등도 받았다. 따라서 위의 음서 관련 사료는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세습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조 음직소고」,『유홍렬화갑기념논총』,김의규,서울대학교 출판부,1971.
「고려 관인사회의 성격에 대한 시고」,『역사학보』58,김의규,역사학회,1973.
「고려시의승음혈족과 귀족층의 음서기회」,『김철준화갑기념사학논총』,노명호,지식산업사,1983.
「고려사 선거지의 구성과 내용 및 성격」,『한국사학보』43,박용운,고려사학회,2011.
저서
『고려 음서제도 연구』, 김용선, 일조각, 1991.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박용운, 일지사, 1990.
『한국 가족제도사 연구』, 최재석, 일지사, 1983.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 허흥식, 일조각, 1981.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