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생(門生)은 종백(宗伯)에게 부자의 예를 갖춘다. 당나라의 배호(裴皥)는 세 번 지공거
를 역임했는데, 그의 문생 마윤손(馬胤孫)이 과거를 관장하면서 새로 급제한 문생을 데리고 가 배호를 뵈니, 배호는 시를 지어 이르길 “세 번 예위(禮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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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의 별칭. 예조(禮曹)에서 맡았기에 이렇게도 부름.
를 맡는 동안 나이 80이 되었으니 문생이 문하에 문생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우리 고려의 학사 한언국(韓彦國)이 문생을 거느리고 문숙공 최유청(崔惟淸, 1095~1174)을 뵈니,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길 “줄을 지어 찾아오니 나에게는 어떤 영화인가? 문생의 문하생을 보니 기쁘도다.”라고 하였다. 양숙공 임유(任濡, 1149~1212)는 [의종
⋅명종
⋅신종
] 3대에 걸쳐 제구(帝舅)
는 시를 지어 축하하며 이르길, “10년을 재상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태평을 도왔으며, 네 번의 과거 시험을 홀로 주관하였네. 국사(國士)는 예부터 국사를 따랐으니 문생은 이제 다시 문생을 얻었네.”라고 하였다. 양숙공의 맞아들 평장사 임경숙(任景肅)은 네 번이나 문병(文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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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장인
가 되었고 총재의 지위에 있었다. 공의 문하생인 문정공 조충(趙冲)이 사성(司成)으로 과거를 맡고는 자신이 천거한 문생들을 이끌고 양숙공을 뵈니, 고원(誥院)
조서(詔書), 교서(敎書) 등의 글을 지어 바치던 관청.
의 이인로(李仁老, 115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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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
을 맡았는데, 불과 몇 년이 안 되어 문하에는 벼슬에 오른 자가 10여 인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장군 셋과 낭장 하나도 있었으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운각(芸閣)
고려시대 경적의 인쇄 등을 담당하던 교서관(校書館)의 별칭
의 학사 유경(柳璥, 1211~1289)은 과거에 급제한 지 16년 만에 사마시를 관장하여 합격자를 뽑고는 이튿날 찾아가 뵈니 그때 평장사 임경숙은 태사로 치사한 뒤였다. 조카 가운데재상 두 사람과 추밀 두 사람이 있었고 여러 종제, 생질이 또한 모두 경대부였는데, 그들은 임경숙이 네 차례 과거에서 뽑은 문생들과 같이 섬돌 앞에 줄을 나누어 서 있었다. 유경이 문생을 이끌고 들어와 뜰 아래서 배례하니 평장공은 당(堂) 위에 앉았고 악관(樂官)들은 음악을 연주하였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며 탄식하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림 임계일(林桂一)이 시를 지어 이를 축하하길, “양부(兩府)의 균대(鈞台)
재상
들이 뜰 아래서 절하고 당대의 훌륭한 인재들이 문 앞에 모였네. 뛰어난 문생과 자손들을 앉아서 바라보니, 성대한 광경이 대대로 이어짐은 듣기 힘든 일이라네.”라고 하였다. 『보한집』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