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고려 시대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북진 정책과 영토 확장

○ (태조) 원년 6월 병진(丙辰)일에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年號)를 고쳐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고려사』권1, 세가1 태조 원년 6월 병진

○ (태조 원년 9월) 병신(丙申)일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옛 도읍인 평양이 황폐해진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가시밭이 우거져 오랑캐, 즉 여진인들이 그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사냥하다가 변방을 침략하기도 하니 해로움이 크다. 마땅히 백성을 옮겨 이곳을 채우고 변방을 굳게 지켜 대대손손 이롭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는 사촌 동생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사』권1, 세가1 태조 원년 9월 병신

○ (태조) 25년 10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하였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친을 이어 오다가 돌연히 발해를 의심하고는 두 마음을 품어 맹약(盟約)을 어기고 멸망시켰다. 이는 매우 도리에 어긋난 일이니 화친하여 국교를 맺을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고는 드디어 외교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놓아 모두 굶어 죽게 하였다.

『고려사』권2, 「세가」2 태조 25년 10월

○ 元年夏六月丙辰, 卽位于布政殿, 國號高麗, 改元天授.

『高麗史』卷1, 「世家」1 太祖 元年 6月 丙辰

○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廣評侍郞列評守之.

『高麗史』卷1, 「世家」1 太祖 元年 9月 丙申

○ 二十五年冬十月, 契丹遣使, 來遣槖駝五十匹. 王以契丹嘗與渤海, 連和, 忽生疑貳, 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 遂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繫槖駝萬夫橋下, 皆餓死.

『高麗史』卷2, 「世家」2 太祖 25年 10月

이 사료는 고려의 건국과 태조가 취한 북진 정책의 내용이 서술된 자료이다. 사료 1은 918년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새 왕조가 옛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자주적으로 후삼국을 통일했다는 자긍심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천수에는 하늘의 뜻을 받아 이룩했다는 의미가 상징화되어 있다.

이처럼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한 태조(太祖, 877~943, 재위 918~943)는 국호를 ‘고려’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에 주목하였다. 평양을 정치⋅군사적으로 중요시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사료 2는 바로 이러한 태조의 의지를 보여 준다.

태조가 이처럼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한 데에는 그의 정치⋅군사적 기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본거지는 송악군으로, 이곳은 현재의 개성에 해당한다.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은 송악에 근거지를 둔 왕건을 지지하였고, 왕건 역시도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구려의 정통을 잇고자 하였다.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태봉(泰封)의 궁예(弓裔, ?~918, 재위 910~918)가 말년에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으로부터 도참(圖讖)의 글이 새겨진 옛 거울(古鏡)을 얻은 일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도참 가운데는 ‘먼저 닭을 잡은 뒤 오리를 잡는다[先操雞後搏鴨]’는 구절이 있었는데, 닭은 계림, 즉 신라를 가리키고 오리는 압록강을 뜻한다. 신라를 통합하여 압록강으로 진출하겠다는 고구려 계통 호족들의 바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태조가 평양을 큰 어려움 없이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곳에 강한 힘을 가진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계 호족들의 적극적 협조도 이를 손쉽게 하였다. 따라서 태조는 평양으로 백성을 옮겨 평양이 고려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대도호로 삼아 사촌 동생인 왕식렴(王式廉, ?~949)과 광평시랑 열평(列評)을 보내 이를 지키게 했던 것이다. 평양 대도호는 이로써 고려 왕실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태조는 평양 대도호를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짝하는 서울이란 의미로 서경(西京)이라 불렀다. 후일 서희(徐熙, 942~998)가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할 때 고려의 수도를 평양이라고 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경에는 정치⋅행정⋅군사⋅교육 등의 체제가 갖춰지게 되었고, 고구려의 제천(祭天) 행사인 동맹(東盟)을 계승하는 팔관회가 매년 10월에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서경을 건설하고 북진 정책을 위해 서경 이북에 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키며 자주 행차하던 때에 동북아 국제 정세는 큰 변화를 맞고 있었다. 916년 건국한 거란이 중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던 것이다. 거란은 먼저 고려를 안심시키기 위해 922년(태조 5) 2월 낙타와 말을 보내며 화친을 꾀하였다. 반면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926년 고려와 형제 관계를 맺고 있던 발해와 화친 관계를 끊고 삽시간에 멸망시켜 버렸다. 거란과 완충 역할을 하던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고려와 거란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발해의 왕족과 귀족들은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태조는 거란의 야욕을 파악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재고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 중원으로 진출할 마음을 품었던 거란은 고려에 계속 사신을 보내 화친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고려의 군사⋅외교적 움직임을 염탐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사료 3이다. 즉 사료 3은 942년(태조 25) 10월에 있었던 사건으로, 거란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 낙타 등을 선물한 내용이다. 하지만 태조는 이러한 호의와 선물을 단호히 거부했다. 명분은 거란이 화친을 맺고 있던 발해를 도리에 어긋나게 멸망시켰다는 것이었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던 고려는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표방한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런 발해의 멸망은 고려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으므로 묵과할 수 없었다.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으로, 이는 태조가 그동안 지속해 온 북진 정책이 큰 고비를 맞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태조는 과감하게 거란 사신을 유배 보내고 선물인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거란에 대하여 철저히 대비하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태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서경 중시론’을 더욱 강화하였다.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자손들에게 확실히 제시한 셈이었다. 태조의 이러한 조치는 당시 고려가 처한 현실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거란의 세력이 강성하다는 점이었다. 이 상황에서의 단호한 외교 단절은 양국 간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태조가 위험을 감수한 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자긍심과 군사적 자신감이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이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군사적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북진을 꾀하는 고려와 동진 및 남진을 꾀하는 거란은 충돌 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료 1과 사료 2는 건국 초기임에도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자주 왕조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서경을 전진 기지로 삼아 북진 정책을 취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음을 잘 보여 준다. 사료 3은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고려가 거란 세력이 팽창해가는 데 대해 상당히 고심하였고, 결국은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통해 고려의 자주성과 진취성을 고취하고자 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는 중요한 사료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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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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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
『고려의 북진정책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박한남, 국사편찬위원회, 1995.
「10~12세기의 국제정세」, 이용범, 국사편찬위원회, 1974.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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