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李資謙, ?~1126)은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의 손자요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 ?~?)의 아들인데, 문음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
합문은 조회(朝會)의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관서, 지후는 정7품 관직
가 되었다. ……(중략)……
예종(睿宗)
이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비로 삼은 후 급속히 벼슬이 올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었다. 인종
이 이자겸에게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 칭호와 수태사중서령(守太師中書令) 벼슬을 주고 소성후(邵城侯)로 봉하였으며 식읍 5000호에 실봉 700호를 주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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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서성의 정2품 관직
관직과 주국(柱國) 훈위를 받고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태위(守太尉)
정1품에 해당하는 명예직
로 승진하고 익성공신(翼聖功臣)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 어머니 김씨(金氏)는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으로 봉하고 그의 처 최씨(崔氏)는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봉했다. 하루 동안 그 집에 왕명이 세 차례나 내렸다. 또 계속하여 동덕추성좌리공신(同德推誠佐理功臣) 칭호와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 작위(爵位), 식읍(食邑) 2300호(戶)에 실봉(實封) 300호를 더 주었으며, 아들들에게도 작위를 주었다. 왕이 죽을 때 태자(太子)가 어렸기 때문에 왕의 여러 아우들이 왕위를 노렸지만, 이자겸이 태자를 즉위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인종(仁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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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은 다른 가문 출신이 후비가 되어 권력과 은혜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셋째 딸을 후비로 삼도록 청하였다. 왕이 어쩔 수 없이 따랐는데, 이날 폭풍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뿌리째 빠졌다. 그 후 또 넷째 딸을 후비로 보냈는데 그날도 비바람이 심하였다. ……(중략)……
이자겸은 자기 부(府)에 속한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개인적으로 송(宋)나라로 보내 표문(表文)과 토산물을 바치면서 지군국사(知軍國事)
국사를 처리하는 직책으로, 군무(軍務)와 국정을 맡아 다스린다는 뜻
라고 자칭하였다. 이자겸의 권세와 총애가 나날이 높아져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는 온갖 계략으로 헐뜯고 비난하였다. 왕의 아우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는 경산부(京山府)로 추방하였고 평장사 한안인(韓安仁, ?~1122)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죽였다. 또 최홍재(崔弘宰), 문공미(文公美), 이영(李永), 정극영(鄭克永) 등 50여 명을 귀양 보냈다. 자신의 친족을 요직에 배치하고 매관매직하여 자기의 세력을 심었다. 스스로 국공(國公)이 되어 자기의 왕태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전국에서 온 축하문을 전(箋)이라 불렀다. ……(중략)……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고 싶어 왕에게 자기 집으로 와서 임명장을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날짜까지 강제로 정하였다. 비록 일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왕은 그를 자못 미워하게 되었다. 내시 김찬(金粲, ?~1135)과 안보린(安甫鱗, ?~1126)이 항상 왕을 보필하면서 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동지추밀 지녹연(智祿延, ?~1126)과 함께 이자겸을 체포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내고자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과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을 불러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지원(李之元)의 장인 척준경(拓俊京, ?~1144)이 그 아우 척준신(拓俊臣)과 함께 권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최탁 등은 평소부터 척준신이 하급 관리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임명되어 자신들의 상관이 된 것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동참하였다.
약속을 정한 후 초저녁에 군사를 인솔하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먼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순(拓純)과 지후 김정분(金鼎芬), 녹사 전기상(田其上), 최영(崔英)
등을 죽이고 시체는 궁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중략)…… 척준경이 궁궐 왼쪽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금위별장(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뽑아 들고 쫓아오므로 척준경은 물러났다. 이작이 문을 닫으니 척준경이 사람들에게 각 문을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죽여라!”라고 하였다. 밤에 왕이 걸어서 산호정(山呼亭)까지 갔는데 시종이 다 도망가고 오직 근신(近臣) 임경청(林景淸) 등 10여 명만이 있었다. 왕은 혹시 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편지를 보내 이자겸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은 양부(兩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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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문하성과 중추원
의 의견이 무서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수(李壽, ?~1137)가 좌중에 소리쳐 말하기를, “임금이 비록 조서를 주었다 해도 이공(李公)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자겸은 결국 자신의 뜻을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 조서를 반환하면서 말하기를 “저에게는 두 마음이 없으니 전하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중략)……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해져서 그가 하는 일은 아무도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 ……(중략)……
왕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 1067~1139)과 몰래 모의하여 척준경에게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라고 회유하니 척준경은 마음 속으로 옳게 여겼다. 왕은 척준경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사리에 어두워 흉악한 자들이 일을 저지르게 하여 대신들에게 심려를 끼쳤으니, 이는 모두 나의 죄이다. 이제부터 몸소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신민들과 함께 그 덕을 새롭게 할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 그대는 다시 수신(修身)에 노력하여 지난 일은 다시 생각지 말고 성심껏 나를 도와 후환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때마침 이지언의 종(奴)이 척준경의 종에게 욕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왕의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가 죽어야 마땅하고, 너도 적몰(籍沒)되어 관노비가 되어야 할 것인데 어찌 나를 욕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척준경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 의관을 벗어 버리면서 말하기를 “내 죄가 크지! 담당 관아에 나아가 스스로 죄를 밝히겠다”라고 하고는 바로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리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누웠다. 이자겸은 이지미, 이공의를 보내서 화해를 청하였으나 척준경은 욕하면서 “이전의 난은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인데 어째서 유독 내 죄라고 하며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느냐?”라고 말하고는 끝내 만나 보지도 않고 돌아가 고향에서 늙고 싶다고 선언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 1071~1132)을 보내어 속히 나와 일을 보라고 권하고 안장을 얹은 말을 주었다. ……(중략)……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
이(李)자를 분해하면 ‘十八子’가 된다
가 왕이 된다는 비기(秘記)를 들고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계획하여 독을 떡에 넣어 왕에게 먹게 하려 했다. 왕비가 몰래 왕에게 알리고 그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더니 까마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고 왕비를 시켜 왕에게 드리게 하였는데 왕비가 그릇을 들고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그 왕비는 바로 이자겸의 넷째 딸이다. 척준경이 이미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최사전이 또 이 틈을 타서 설득하니 척준경이 마침내 계책을 정하고 글을 올려 “충정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척준경과 이공수가 협의하여 이자겸과 그 처자들을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장군 강호(康好), 고진수(高珍守) 등을 죽였는데 그들은 모두 이자겸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한 자였다. ……(중략)……
이자겸은 얼마 후 영광(靈光)에서 죽었다.
『고려사』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