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일) 서론
민족의 성쇠는 항상 사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에 달린 것이며 그 방향성은 매번 어떤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학술⋅정치⋅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것은 어떤 사건이 원인일까? ……(중략)…… 어떤 사건이 앞서 서술한 종교⋅학술⋅정치⋅풍속 등의 방면에 노예성을 낳게 하였는가? 나는 한마디로 고려 인종
13년(1135) 서경 전역(西京戰役)
, 즉 묘청
의 난이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에게 패한 데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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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전역
때 양쪽 병력이 각기 수만에 불과하고 전란의 시작과 끝이 불과 2년에 그쳤지만, 그 전란의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서경 전역
이전 고구려의 후예로서 북방의 대국으로 자리 잡았던 발해 멸망
보다도, 서경 전역
이후 고려와 몽고 간의 60년 전쟁보다도 몇 배나 중요하였다. 대개 고려에서 조선까지 1000여 년 동안 서경 전역
보다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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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전역
전역을 역대 역사가들은 다만 국왕의 군대가 반란군을 친 전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낭불 양가(郎佛兩家)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었다. 묘청(妙淸, ?~1135)
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
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
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역사는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굴복되고 말았다.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
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다면 조선사는 독립적⋅진취적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000년 동안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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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십) 결 론
이상 서술한 바를 다시 간략히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역사는 원래 낭가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나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교도인 묘청
이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 그 거동이 지나치게 이치에 맞지 않음으로써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고 말았다. 낭가의 윤언이(尹彦頤, ?~1149) 등은 유가의 압박 아래에서 겨우 남은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뒤 몽고의 난을 지나면서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고, 조선의 창업이 유가의 사대주의로 이루어지자 낭가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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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연구초』,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