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단(兪升旦, 1168~1232)의 처음 이름은 유원순(兪元淳)으로 인동현(仁同縣)
경상북도 구미시
사람이다. 입이 무겁고 말이 적으며 믿음직하고 겸손하였으며 아는 것이 많고 기억력이 좋았다. 특히 고문(古文)으로는 세상에서 유원순의 글을 첫째로 꼽았다. 경서와 사서에 대한 깊은 뜻을 묻는 사람에게 의문이 풀리도록 명석하게 풀이해 주었고, 심지어 불경까지 통달하였다. 일찍이 상서(尙書) 박인석(朴仁碩)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박인석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 그를 극진히 우대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박인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어두운 밤을 비추는 신기한 구슬과 같아서 아무리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할 인물이다. 하물며 그가 이처럼 찾아 주었는데 어떻게 우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강종(康宗, 1152~1213)
이 태자로 있을 때 (그를) 발탁해 막료로 삼았고, 과거에 급제하자 시학으로 임명하였다. 뒤에 강종
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유승단도 배척당하여 벼슬을 잃었다. 희종(熙宗, 1181~1237)
때 비로소 남경
사록참군(南京司錄參軍)으로 임명되었으나, 유수(留守) 최정화(崔正華)와 사이가 좋지 않아 심악감무(深岳監務)로 강등되자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이 어렸을 때 또한 그에게 글을 배웠으므로, 그가 즉위하자 유승단을 수궁서 승(守宮署丞)으로 임명하고 두터운 총애를 베풀었으며 나중에는 사부(師傅)로 삼았다. 이후 예부시랑(禮部侍郞), 우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하였다.
'강종(康宗, 1152~1213)' 관련자료
'강종' 관련자료
'희종(熙宗, 1181~1237)' 관련자료
'남경' 관련자료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관련자료
몽골의 대군이 경기 지역으로 침입하자 최이(崔怡, ?~1249)가 재추 대신들을 모아 놓고 강화 천도를 의논하였다. 당시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개경
의 호수가 10만 호에 이르고, 거리에는 단청으로 채색한 큰 집들이 즐비했으며, 사람들은 제 땅에 안착해 옮기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최이의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한마디도 발언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유승단이 홀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니,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그들도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과 종사를 내버리고 섬에 구차히 엎드려 세월을 보내면서, 달마다 변방의 백성 가운데 장정들은 적의 칼날에 맞아 죽게 만들고 노약자들은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책은 아니다”라고 반대하였으나, 최이는 (이를) 듣지 않았다.
'개경' 관련자료
고종
19년(1232)에 죽으니, 시호는 문안(文安)이라 하였다. 아들은 없다.
'고종' 관련자료
『고려사』권102, 「열전」15 [제신] 유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