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고려 시대몽골의 침략과 저항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국서

일, 전의 문영 5년(1268, 원종 9년)의 장(狀)에서는 몽골의 덕을 찬양했는데, 이번 문영 8년(1271, 원종 12년)의 서장에서는 “위취자(韋毳者)들은 멀리 내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일, 문영 5년의 서장에서는 몽골 연호를 썼는데 이번에는 쓰지 않은 일.

일, 전의 서장에서는 “몽골의 덕에 귀부하여 군신의 예를 이루었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강화로 천도한 지 40여 년이나 되고 오랑캐를 따르는 것[被髮左袵]은 성현이 꺼린 것이라 하고 또 진도로 천도한 일.

일, 이번 서장 앞부분에서는 (몽골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있게 된 까닭을 쓰고, 뒷부분에서는 “몽골이 고려를 부렸다”고 하니 전후가 서로 다르다. 어찌된 일인가?

일, 풍랑으로 표류된 자들을 호송한다고 한 일.

일, 김해부의 병사 20여 명을 먼저 일본국으로 보낸다고 한 일.

일, 우리 본조(고려)가 삼한을 통합했다고 한 일.

일, 사직을 안녕케 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린다고 한 일.

일, 수만의 말 탄 군사를 청한 일.

일, 흉악한 상소가 도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 한 일.

일, 예물을 드린다고 한 일.

일, 귀조(일본)가 사신을 보내 방문하라 한 일.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이기백, 일지사, 1987), 「고려첩장불심조조」

一 以前狀【文永五年】揚蒙古之德 今度狀【文永八年】韋毳者無遠慮云云如何

一 文永五年狀書年號 今度不書年號事

一 以前狀歸蒙古之德成君臣之禮云云 今狀遷宅江華近四十年 被髮左袵聖賢所惡 仍又遷都珍嶋事

一 今度狀端不從成戰之思也 奧爲蒙所使云云 前後相違如何

一 漂風人護送事

一 屯金海府之兵 先二十許人送日本國事

一 我本朝統合三韓事

一 安寧社稷 待天時事

一 請胡騎數萬兵事

一 達兇疏 許垂寬宥事

一 奉贄事

一 貴朝遣使問訊事

『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이기백, 일지사, 1987), 「高麗牒狀不審條條」

이 사료는 1271년(원종 12년) 고려가 외교문서로 일본에 보낸 내용에 대해 당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이를 검토하여 교토[京都] 조정에 보내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정리한 12가지 항목이다. 삼별초 정부의 정통성 및 활동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살펴보면 외교문서의 진실성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문서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 이미 고려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이 보낸 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1271년 문서를 보낸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실제 고려에서는 1267년(원종 8년) 원종이 몽골의 요구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몽골에 사신을 파견할 것을 권하는 국서를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수령을 거부했고, 결국 고려 사신들은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이때 보낸 문서가 일본 나라의 동대사 존승원 소장 문서 중 「조복이조원적초(調伏異朝怨敵抄)」에 필사되어 전한다. 그 내용은 몽골 황제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려 하니 통호하길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문서 수령을 거부하긴 했지만 이를 정리해 두었는데, 이는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 상황 전개와 결과에 대해 여러 경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결과였다. 그리고 1271년 다시 고려에서 첩장이 왔을 때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앞서 첩장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이러한 의문을 정리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은 고려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271년 첩장은 고려 조정이 보낸 것이 아니라 몽골과 지속적인 항쟁을 주장하며 새로 국왕을 옹립하고 진도로 피신한 삼별초 정부가 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에 대한 정반대의 입장이 첩장에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몽골의 덕을 칭찬하다가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고 한 것, 몽골 연호를 쓰다가 그 연호를 쓰지 않은 것, 오랑캐의 풍속[被髮左袵]은 성현이 싫어하므로 이에 입각하여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한 것, 몽골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고 한 것 등이다.

결국 일본 정부는 문서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삼별초 정부가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일본에 사신과 문서를 보냈으며, 삼한을 통합하고 사직을 안녕케 하였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료는 삼별초의 항쟁과 몽골-고려/삼별초 정부-일본의 외교 관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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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남해 항쟁」,『역사와 경계』57,배상현,부산경남사학회,2005.
「‘고려첩장불심조조’의 재검토」,『한국중세사연구』창간호,유영철,한국중세사학회,1994.
「고려 삼별초의 항전과 진도」,『도서문화』37,윤용혁,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2011.
「삼별초 진도정권의 성립과 그 전개」,『한국사연구』84,윤용혁,한국사연구회,1994.
「오키나와 출토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한국사연구』147,윤용혁,한국사연구회,2009.
「삼별초의 천도항몽운동과 대일통첩」,『한국의 역사상』,이우성,창작과비평사,1982.
저서
『한국중세대일교섭사연구』, 나종우,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6.
『한국상대고문서집성』, 이기백, 일지사, 1987.
편저
『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상)』, 노명호⋅박재우 등,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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