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전기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

승정원의 기능과 역할

승정원(承政院) 【임금의 명령을 받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일을 담당한다. 당하관에는 언제나 문관을 쓴다.】

경국대전』권1, 「이전」, 경관직 정삼품아문

승정원(承政院)은 임금의 대변인이 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고 임금과 가깝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중시하여 당상관은 이조(吏曹)나 대사간을 거쳐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중략)… 승정원은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므로 그 책임이 가장 막중하여, 승지에 임명되는 자는 인망(人望)이 마치 신선(神仙)과 같으므로 세속 사람들이 ‘은대(銀臺) 학사’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궁문(宮門)은 파루(罷漏)가 되면 열고 인정(人定)이 되면 닫곤 하였는데, 승지 등이 4경(更)에 대궐에 나아가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가므로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이 명하여 궁문을 날이 밝으면 열고 어둑해지면 닫도록 하자 사람들이 모두 이를 편안하게 여기었다. 이에 앞서, 승지는 단지 한 사람만 입직(入直)을 하였다. 세조(世祖) 때 이교연(李皎然, 1413~1475)이 입직하는 중에 술이 취해 누워 있었는데, 세조가 하문(下問)을 하였으나 이교연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두 사람이 입직을 하도록 하였다.

李裕元, 『林下筆記』卷22 文獻指掌編 喉院之緊

承政院 【掌出納王命, 堂下官並用文官.】

『經國大典』卷1, 「吏典」, 京官職 正三品衙門

承政院爲喉舌之地, 其任極要近, 故國朝重之, 堂上官自吏曹大諫, 僅得爲之. …(中略)… 承政院出納王命, 其任最重, 拜承旨者, 望若神仙, 俗謂之銀臺學士. 先是宮門罷漏而開, 人定而閉, 承旨等, 四更詣闕, 夜深還家, 睿宗命宮門平明而開, 乘昏而閉, 人開安之. 先是承旨之一人入直. 世祖朝李皎然, 入直醉臥, 世祖下問, 皎然不能起. 自是二人入直.

李裕元, 『林下筆記』卷22 文獻指掌編 喉院之緊

첫 번째 사료는 『경국대전』에 수록된 승정원의 역할을 규정한 것이다. 두 번째 사료는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수록된 승정원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이다.

승정원은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정종 2) 4월 중추부(中樞府) 승지(承旨)가 승정원(承政院) 승지로 개칭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승정원은 이후 1401년(태종 1) 7월 중추원에 해당되는 승추부(承樞府)가 설치되면서 한 때 혁파되었으나 1405년 승추부가 해체되면서 다시 설치되어 독립된 관서로 존재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때 6대언체제(六代言體制)가 완성을 보게 되는데, 이전까지 도승지(都承旨)의 전신인 지신사(知申事)를 비롯해 4대언(代言)이 이(吏)⋅호(戶)⋅예(禮)⋅병(兵)⋅공조(工曹)를 관장하던 것에서 새롭게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신설, 형조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지신사(知申事)가 도승지로, 대언이 승지로 그 명칭이 개편되면서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승정원은 주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또한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이에 대한 왕의 결재 사항을 각 관청에 하달하는 업무도 맡았다. 이러한 보고 체계가 조선 초기부터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 보고 경로는 다원화되어 있었고 세종대에서야 이를 승정원으로 일원화했다. 보고 주체도 승정원의 업무 처리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은대조례』에서 “인종대 모든 공사(公事)는 합문(閤門, 편전의 앞문) 밖에서 모든 관원이 친히 아뢰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승정원 관원이 배석한 자리에서 6조가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형태였음이 짐작된다. 그 후 6조가 직접 보고하는 제도는 폐지되고 승지에게 말을 전하면 주서는 그것을 문자로 바꾸어서 문서로 보고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 문서에서 보고 내용은 통상 “모승지(某承旨), 이모사언계왈(以某司言啓曰), 운운(云云)”의 형태로 시작하였는데, 이는 “아무개 승지가 ○○관청의 말로 아뢰기를 ‘~이라’ 했다. ”라는 의미이다.

승정원을 통해 모든 관서의 보고가 왕에게 올라가고 왕명이 승정원을 통해 관서에 내려짐으로써 승정원의 체제도 조선 시대 6조의 체제에 맞게 6승지로 운영됐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형조를 담당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만약 승지가 해당 관청의 관원과 상피(相避)의 관계에 있게 되면 왕에게 보고하여 담당 부서를 바꾸기도 했고, 특정의 승지를 상례에는 벗어나지만 왕명으로 다른 부서를 관장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피란 친인척 관계에 있거나, 업무상 서로 혐의가 있는 관계의 사람들이 같은 관서에 재직하는 일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상피를 하는 이유는 일의 과정에 사적인 감정을 배제시킴으로써 일이 공적으로 처리되게 하려는 까닭이었다.

승정원은 이밖에도 오늘날 관보와 유사한 조보(朝報)의 발행을 주관하였으며, 궁궐문의 열쇠 관리를 최종적으로 관장하였다. 조선의 아침은 대궐문이 열리면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만큼 대궐문이라는 것은 단순히 출입문 의미 이상을 갖는데, 그 최종 책임이 승정원에 있었다. 승정원의 업무는 국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항상 국왕의 지근거리에 청사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서남쪽 월화문 밖에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정궁으로 창덕궁이 활용되면서 승정원은 인정전 동쪽에 위치하였다.

승정원의 관청 일기인 『승정원일기』가 현전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명을 출납하던 국왕 비서실의 일기이다. 왕명 출납은 물론이요, 국왕에게 보고되고 처리된 모든 일들과 의례적 사항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었으며, 국정 논의 현장에 대한 기록 또한 수록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현존하는 기록물의 총 기간을 보면 전자가 절반에 불과하지만, 양으로 따지면 약 5배 정도가 된다. 또한 실록이 시정기(時政記)나 사초(史草) 등을 토대로 편집자들이 취사선택하여 가공한 2차 자료라면,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상황을 현장에서 바로 기록한 1차 사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승정원일기』 보고기록의 특징과 정보화 방안」,,이근호,국사편찬위원회,2003.
「조선 세종대 승정원의 활동과 그 정치적 의미」,『역사학보』138,이동희,역사학회,1993.
「조선 태종대 승정원의 정치적 역할」,『역사학보』132,이동희,역사학회,1991.
「승정원고-<은대조례>와 <육전조례>를 통하여 본 그 임무와 직제-」,『진단학보』25⋅26⋅27,전해종,진단학회,1964.
「『승정원일기』의 작성과 사료적 가치」,,정만조,국사편찬위원회,2003.
「조선초기 승정원연구 ; 실제기능과 통치기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한국사연구』59,한충희,한국사연구회,1987.
저서
『조선정치제도연구』, 이재호, 일조각, 1995.
편저
「중앙 정치구조」, 한충희, 국사편찬위원회, 1994.

관련 이미지

경국대전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