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전기유교적 통치 질서의 확립

홍문관의 설치와 그 기능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이 윤은로(尹殷老)의 일1)을 말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 홍문관(弘文館)에서 ‘대간이 한 마디 말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정에 지나친 의논이다. 유순(柳洵)이 사직을 완고히 청하고, 대신(大臣)의 논의 또한 편히 직무에 임할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관원을 교체시켰다. 다만 그 가운데 임명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윤은로의 일을 언급하지 않은 자도 교체하는 예(例)에 함께 두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하다. 그것을 우의정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심회(沈澮)가 “대간 가운데 윤은로의 일과 관련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을 따라 함께 교체되는 것은 사정이 매우 애매합니다. 서용(敍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홍응(洪應)은 “다른 사람의 비방으로 인해 대간을 모두 바꾸면 폐단이 뒤따르지 않을까 두려우나, 지금은 홍문관에서 합사(合司)하여 상소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공론(公論)인지라 교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전의 예에 따르면 언관(言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자는 대개 모두 좌천(左遷)되었는데, 이번에도 전례를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중략) ……” 하고 주장하였다. 윤필상(尹弼商)과 노사신(盧思愼)은 “임명을 받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같이 교체하는 것은 아마도 옳지 못한 듯합니다.”라며 의견을 내놓았다. 또 이극배(李克培)는 “홍문관의 한때의 말로써 대간을 모두 바꾸는 것은 중요한 부분을 잃을 듯하기 때문에 신이 이전의 의논에서 바꾸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파직하였으므로,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다만 임명을 받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아울러 교체하는 것은 더욱 애매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몸소 글을 써서 승정원에 지시하기를, “대간이 이미 홍문관의 공론 대상이 되는 바람에 모든 관원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제 또 벼슬에 임명된 날의 많고 적음을 따져 벼슬을 유지하거나 물러나게 하면 사태가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신종호(申從濩) 등이 “신 등의 생각으로는 벼슬에 임명된 날이 오래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분별한다면, 오래전에 임명된 자는 직무를 게을리한 죄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모두 평천(平遷)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자, 임금이 “좋다.”고 전교하였다.

성종실록』권242, 21년 7월 24일(갑술)

1)윤은로는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오빠이다. ‘윤은로의 일’이란 1490년(성종 21) 4월경 윤은로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시장 사람들과 함께 여러 고을에 청탁을 해서 공물방납(防納)하고 많은 이익을 취한 일을 말한다. 방납이란 백성들이 바쳐야 할 공물을 대신 바치고 백성들에게 그 비용을 받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방납 업자들은 백성들에게 물건 가격의 몇 배를 청구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이 일로 윤은로는 파직되었다가 1개월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에 대하여 홍문관에서는 대간들이 윤은로의 관직 진출을 힘써 막지 못하였다며 탄핵하였다.

傳于承政院曰: “臺諫非不言尹殷老事, 弘文館以謂: ‘臺諫無一言.’ 此過情之論. 柳洵固請辭職, 大臣之議, 亦以爲不可安然在職, 故已令改差. 但其中, 受任日淺, 未及殷老之事者, 竝在改差之例, 實爲不可. 其議于右議政以上.” 沈澮議: “臺諫中未及殷老之事, 而隨他改差, 情甚曖昧. 敍用何如?” 洪應議: “因外人譏諷, 盡遞臺諫, 恐有後弊, 然今則弘文館, 合司上疏, 是誠公論, 不可不改差. 但前例不得言責者, 率皆左遷, 今亦依舊例何如? …(中略)…” 尹弼商⋅盧思愼議: “受任日淺者亦改差, 恐爲不可.” 李克培議: “以弘文館一時之言, 盡遞臺諫, 似失大體, 故臣前議以爲不宜遞差. 然今已罷職, 事已往矣. 但受任日淺者竝在改差之列, 尤爲曖昧.” 御書示承政院曰: “臺諫旣被弘文館公論, 擧司貶黜, 今又分辨仕日多少進退之, 其於事體何如?” 都承旨申從濩等啓曰: “臣等謂以日之久近辨別, 則久任者, 不無曠官之罪. 請皆平遷.” 傳曰: “可.”

『成宗實錄』卷242, 21年 7月 24日(甲戌)

이 자료는 홍문관(弘文館)의 언론 활동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홍문관의 발언을 공론(公論)이라고 표현한 데서 홍문관의 언론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홍문관은 1463년(세조 9) 양성지(梁誠之, 1415~1482)의 건의에 따라 오늘날의 도서관과 같은 기능을 하였던 장서각(藏書閣)을 홍문관이라고 칭한 데서 출발하였다. 이때는 서적의 보관과 관리 등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후 1478년(성종 9) 확대 개편되면서부터 홍문관은 학술⋅언론 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홍문관에서 궁중의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고, 국왕의 자문에 응하며, 경연(經筵)을 주관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홍문관 관리들은 국왕이 참여하는 경연이나 매일 아침 신하들이 임금에게 정사를 보고하던 상참(常參) 등에 참여하여 국정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왕의 정치적 교양을 고양하고 자문 역할에도 응하는 등 일종의 고문(顧問)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 밖에도 장서를 보존하고 고문(古文)을 연구하거나 과거 시험의 시험관인 시관(試官)을 차출하는 것 역시 홍문관의 업무였다.

홍문관은 또한 사헌부나 사간원과 함께 언론 기능 역시 수행하였다. 이는 홍문관을 확대 개편한 성종의 의도이기도 하였는데, 성종이 홍문관의 기능을 확대한 데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즉위 초에는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7년간 수렴 청정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당시 훈구 세력의 핵심 인물인 한명회(韓明澮, 1415~1487)정인지(鄭麟趾, 1396~1478) 등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훈구 세력의 과도한 정치 권력 집중과 남용, 농장의 확대 등 정치적⋅사회적으로 여러 모순이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왕권을 안정시키려면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성종은 이를 사림 세력이 주로 진출해 있던 대간(臺諫) 조직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였다. 대간은 국정 감찰 임무를 맡은 사헌부의 대관(臺官)과 국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임무를 맡은 사간원의 간관(諫官)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이들 관원은 각기 관부가 달랐고, 맡은 일 역시 표면적으로는 구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다 같이 국정 운영상의 문제점 논박, 관료들의 비행에 대한 규찰 및 탄핵, 군주의 잘못에 대한 지적 등 수행하는 업무에서는 중복되는 점이 많았다.

성종은 이러한 대간(臺諫)의 언론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성종대 중엽부터는 홍문관의 언론 기능도 강화하였다. 1488년(성종 19) 성종대간(臺諫)과 함께 홍문관에서도 다른 관청이나 관원의 업무를 지적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홍문관은 초기에는 대간(臺諫)에서 제기한 문제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언론 활동을 전개하다가, 차차 대간(臺諫)들이 제기하지 않은 문제들도 제기하거나 대간(臺諫)의 언론 태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점차 홍문관은 언론 기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홍문관의 언론 활동은 홍문록(弘文錄)이라는 인사 시스템을 통해서 보장받았다. 홍문록이란, 홍문관 관원들이 후임 홍문관 관원이 될 수 있는 후보자를 선발하는 일 또는 문서를 말한다.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 중에서 재능 있는 인사를 미리 선발해 홍문록에 올려 놓고 이들 중에서 홍문관 관원을 임명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홍문관의 참하관(參下官), 즉 정7품 이하 관원이 주도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참하관들이 자질이 있다고 생각되는 적임자를 후보로 올리면 부제학 이하 응교, 교리, 수찬 등은 비밀리에 적정한 후보에게 점을 찍어 책으로 만들었다. 이 권점책은 이조를 거쳐 의정부에 올라가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홍문관의 본래 기능은 왕의 자문 및 학술 업무였으므로 후보자 선발의 요건은 학행과 인품이 무엇보다 우선되었다. 또한 언론 기관으로서 홍문관의 역할이 강화될수록 후보자에게는 강직한 인성과 청렴성이 각별히 요구되었다. 이런 홍문록 제도는 홍문관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취지도 있지만, 동시에 왕이나 재상들이 부당하게 인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보호 장치의 역할도 하였다.

홍문관은 이후 대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일컬어지고, 언론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언론이 활성화되면서 언관들의 인사가 엄격해졌고, 우수한 재원으로 인정받은 홍문관 관원들이 1491년(성종 22)부터는 대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반화되면서 홍문관과 대간의 관계는 친밀해졌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494년(성종 25)부터 홍문관 관원은 이조와 병조의 낭관(郎官)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전기에 낭관은 주로 관청 내의 실무적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으므로 어떠한 사안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종 후반기에 이르면 낭관들은 부서 내의 사안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낭관권(郎官權)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낭관권 중 인사를 다루는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다른 낭관에 비해 정치적 비중이 높았다. 홍문관은 초기에는 고유의 기능을 위해서 다른 관청으로의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서서히 대간뿐 아니라 낭관으로의 진출도 허용되었다. 이를 통해 홍문관을 중심으로 언관과 낭관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관행이 생겼고, 언관의 지원을 받게 된 낭관은 그 지위를 상승시키면서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 성종대의 대간언론」,『한국사론』12,남지대,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5.
「조선조 사림정치의 권력구조」,『경제사학』2,송찬식,경제사학회,1985.
저서
『조선초기 언론사연구』, 최승희, 일조각, 2004.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 연구』, 최이돈, 일조각, 1994.
편저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최이돈, 국사편찬위원회, 1996.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최이돈,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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