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민의 수령 고소 금지
사헌부에 전교를 내려 말하기를, “성화(成化) 9년(1473, 성종 4) 8월 몇 일의 전교 가운데, ‘수령이 죄를 범하면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부민(部民)이 수령의 잘못을 몰래 기록하여 이것을 가지고 공갈하여 꼼짝 못하게 하니, 관리도 감히 누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들은 부렴(賦斂)과 요역에 모두 참여하지 않는데, 부민 중 간혹 뇌물을 주는 자도 있다. 이러한 자들이 여러 고을에 각각 몇 사람씩 있지만, 사람들이 이름은 지목하면서도 감히 범해서 말하지 못하는 자가 실로 많다. 그러므로 여러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이들을 찾아서 단속하게 하되, 이 중 고소를 업(業)으로 삼는 자 중에 뭇사람이 함께 아는 자는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도록 하라. 그리고 그 부민(部民)으로서 그 수령을 고소한 자에 대해서는, 고소한 자의 억울한 일만 국문(鞫問)하고, 그 나머지 그에게 관여되지 아니한 일은 아울러 국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국대전』 소원조(訴冤條)에는, ‘이전(吏典)⋅복례(僕隷)가 그 관원을 고소하거나, 품관(品官)⋅이민(吏民)이 그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면, 자기의 억울한 것은 모두 들어주어 심리한다’라고 하였는데, 근래에 고소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에게 관여되지 아니하는 일을 고하고 있다. 경외(京外)의 법관이 이 모두를 들어주어 심리하기를 허락하니, 전지(傳旨)와 『경국대전』의 본의에 어긋남이 있다. 부민(部民)이 고소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뜻이 아닌 데다 거짓으로 꾸며서 고소하여 수령을 죄에 빠뜨리기를 기도함에 따라 풍속이 점점 야박해지니, 사체(事體)가 온당치 못하다. 이 뒤로는 자기의 억울한 일 외에는 모두 들어주어 심리하지 말아 백성의 풍속이 야박해지는 것을 돌이켜 넉넉하게 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권109, 10년 10월 25일(정미)
傳旨司憲府曰, 成化九年八月日傳旨內, 守令犯罪, 固可罪也. 其部民, 暗記守令之失, 把持恐嚇, 使不得措手, 官吏莫敢誰何. 賦斂徭役, 皆不與焉, 或有賄之者. 諸邑各有數人, 人皆指以爲名, 不敢犯言者實多. 令諸道觀察使搜括, 告訴爲業, 衆所共知者, 全家徙邊. 其部民訴其守令者, 只鞫其自己冤抑, 其餘不干自己之事, 不許竝鞫.
且『大典』訴冤條 吏典⋅僕隷, 告其官員, 品官⋅吏民, 告其觀察使⋅守令, 其自己冤抑, 竝聽理. ’ 近來告訴者, 幷不干自己事告之. 京外法官, 竝許聽理, 有違傳旨及『大典』本意. 部民告訴, 固非美意, 飾詐告訴, 期於陷罪, 風俗寖薄, 事體未安. 今後自己冤抑外, 幷勿聽理, 使民風反薄歸厚.
『成宗實錄』卷109, 10年 10月 25日(丁未)
이 사료는 1479년(성종 10년) 부민의 수령 고소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부민 고소 금지란 조선 시대 중앙이나 지방 관청에 소속된 하급자가 상급 관원의 비리 등을 고소하거나 지방의 아전⋅일반 백성 등이 지방관 고소를 금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조선 시대에 채택된 예치(禮治) 논리에 의한 상하 존비(尊卑)의 명분과 관련이 있다. 단,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모반죄나 대역죄 및 불법 살인죄에 대한 고소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었고, 비리나 불법 행위 또는 오판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서울은 주무부서 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사에서 부민 고소 금지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고려 시대 수령을 고발한 자는 고을에서 내쫓고 그가 살던 집은 파서 연못을 만드는 관행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조선 시대 이전부터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20년(세종 2년)에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의 건의에 따라 이 규정을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수록하였다. 이에 따라 고소를 계속하는 고을은 행정상 강등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의 이런 조치는 품관⋅향리의 세력을 억제하고 강력한 수령권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 초기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방 제도 개혁과 수령권의 강화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이에 따라 수령의 임기⋅고과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부민 고소 금지법 시행으로 전국 330여 개 군현에 파견된 지방관이 저지른 불법 행위나 지방민의 민원 증폭 등이 큰 논란을 일으켜 정부에서는 감찰을 위한 중앙 관리나 찰방(察訪) 파견, 외관의 탐오한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탄핵 등의 제도를 활용하였으나 이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웠다. 결국 1447년(세종 29년)에 가서 부역 불균형, 과중한 세금 징수, 진휼 시행 과정에서 부정, 노비나 토지 소송의 잘못된 판결 등은 본인이 직접 고소하는 것에 한해 부민 고소를 수용한 적도 있다.
또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도 잠시 부민 고소 금지법을 해제한 적도 있지만, 1469년(예종 1년) 다시 시행하기에 이른다. 『경국대전』 「형전」 소원조(訴寃條)에서 부민 고소는 출향(黜鄕)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부민 고소 금지에 대한 논란은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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