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전기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조광조의 개혁 정치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趙光祖) 등이 상소하였다. ……(중략)…… 이제 소격서(昭格署)를 설치한 것은 도교(道敎)를 펴서 백성에게 사도(邪道)를 가르치는 것인데, 기꺼이 따라 받들고 속임수에 휘말려서 밝고 밝은 의리에는 아득하고 탄망(誕妄)한 형상에는 밝습니다. 이는 실로 임금 마음의 사(邪)와 정(正)의 갈림길이요, 정치 교화의 순수하고 잡스러움의 원인이요, 상제(上帝)의 기뻐하고 성냄의 기미이니, 왕정(王政)으로서는 끊고 막아야 할 것입니다.

도교를 신봉하는 것이 민간에서 성행한다 하더라도 임금 된 이로서는 진실로 예를 밝히고 의리를 보여 대도(大道)를 천명하여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끝까지 정도를 보전해야 하는데, 도리어 사도를 존숭하여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받들고 초제(醮祭)를 거행하여 섬기며, 마치 당연히 제향(祭享)해야 할 신처럼 공경하고, 축수(祝壽)와 기도가 더욱 빈번하여 음귀(陰鬼)가 간악을 빚어냅니다. 이는 곧 임금의 계책에 법이 없어서이니 하민(下民)들이 어디에서 본받겠습니까? 비록 상전(常典)과 같이 봉행하여 나라에 모범을 보이더라도, 어리석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기호(嗜好)가 서로 다른 것이 백성들의 상정(常情)이라 감화시키기 어려운데, 하물며 허망한 종교로 인도하여 온 세상을 이상한 지경으로 몰고 가는 것이겠습니까?

아, 백성은 일정한 덕이 없고 임금의 교화를 덕으로 삼습니다. 군주가 하늘을 받들고 백성들의 스승이 되는 것에 있어서 몸소 솔선하여 백성을 교화시켜야 하는 의의가 어떻습니까? 조정에서 이를 염려하고 근심해서 사도를 제거하는 뜻이 간절하고 정도를 세우는 데 전념하여 이를 논열(論列)한 지 달포 남짓하였습니다. 처음 대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논의가 대간(臺諫)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으며 또 시종(侍從)들까지도 간절히 진달하였습니다. 이는 일국의 신료(臣僚)이 오로지 새로이 스스로 힘써 대도(大道)를 함께 생각하여, 덕음(德音)이 내리기를 눈을 닦고 발돋움하여 바라고 있는데 천청(天聽)은 오히려 아득합니다. 정도(正道)를 버리고 사도(邪都)에 미련을 두어 즉시 용단을 내리지 못하시니, 하늘을 믿고 백성들을 감응함이 막혀서 군신(君臣)이 일치하지 아니하고 상하(上下)가 덕으로 삼는 것이 각기 다릅니다. 이와같은데도 큰 화기(火氣)를 북돋우고 순후한 풍속에 젖어들게 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선(善)에 힘쓰도록 한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왕(帝王)이 교화를 독실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민중을 거느리고 선을 행하는 것은 공론을 따르고 하정(下情)을 빼앗지 않는 데에 불과합니다. 더욱 공경하게 마음을 가지고 백성을 대수롭게 여기지 말아야 하며 민첩하고 용맹하고 과단해서 물정(物情 )을 힘써 따르소서. ……(하략)……

중종실록』권34, 13년 8월 1일(무진)

弘文館副提學趙光祖等, 上疏曰, ……(中略)…… 今昭格之設, 載敷道敎, 訓民于邪, 憲憲趨奉, 泄泄謬悠, 邈乎顯顯之義, 瞭然誕妄之象, 實君心邪正之分, 政化純雜之由, 上帝喜怒之幾, 王政之所可剔遏者也. 玆敎之奉, 雖在閭氓聰明, 而作元后者, 固當明禮視義, 克闡大道, 俾迪正方, 而用保其極, 乃反尊置司, 立官以奉, 述醮以事, 敬之如當享之神, 祝禱迷繁, 陰鬼釀奸, 是乃后猷無令, 下民焉式. 雖其奉若典常, 表覈于邦, 惛不燭理, 而趨好乖張, 乃黎庶之常, 難保於薰化, 矧導之以虛誕之敎, 而驅一世於詭怪之域耶. 噫, 民無常德, 德于君化, 其於奉天帥下, 化民以躬之義, 爲何如哉. 朝廷是念是憂, 志切祛邪, 意專植正, 論將在斯, 動餘旬月. 始自大臣, 論極臺諫, 其在侍從, 亦陳懇至. 此, 一國臣僚, 祗新自勉, 共惟大道, 拭跂德音, 而天聽猶邈然. 棄剛懷柔, 徊徨顧戀, 不卽勇斷, 孚感否阻, 君臣二致, 而上下各有所德. 如此而欲其扇大和浸淳風, 俾百僚亹亹於善, 顧不難哉. 帝王所以篤化美俗, 帥衆而爲善者, 不過循其公論, 而不奪其情也. 攸敬厥心, 無謂民小, 敏勇果斷, 務循物情. ……(下略)……

『中宗實錄』卷34, 13年 八月 1日(戊辰)

이 사료는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이 도교(道敎)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昭格署) 혁파를 주장한 상소이다. 성리학을 통해 조선을 이상 사회로 만들려는 조광조의 정치관을 잘 보여 준다.

소격서는 중국 후한 말 장릉(張陵)이 발전시킨 도교가 고려에 전래되어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이 도교의 기도 대상인 천존상(天尊像)을 옥촉정(玉燭亭)에 모셔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하였다. 고려 때는 신격전(神格殿) 또는 소격전(昭格殿)으로 불렸으나, 조선조 1466년(세조 12년)에 소격서로 개칭하고 규모를 축소하였다.

소격서에는 태일전(太一殿)⋅삼청전⋅내외제단(內外諸壇)이 있고,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 개의 신위(神位)와 상(像)들이 조성되어 도사(道士) 등이 재초를 집행하였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 대에 소격서 혁파 문제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儒臣)들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 후 형식적으로나마 혁파되었으나, 위판도 보존되고 초제도 여전히 집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변했다. 중종은 초기에는 반정 공신들의 영향력 하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나, 이후 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이 사망하자 조정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이에 성리학을 위주로 하는 신진 세력을 등용했는데, 당시 중용된 인물이 사림파의 태두였던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현자(賢者)가 군주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성리학적 사회 윤리를 정착하여 조선을 이상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조광조를 선두로 한 신진 사류들은 강경하게 소격서 혁파를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종조종(祖宗) 이래 지켜 온 제도라며 경솔하게 없앨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이에 신진 사류들은 도교는 세상을 속이고 세상을 더럽히는 좌도(左道), 즉 이단이므로 혁파되어야 하며,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天子)만이 지낼 수 있으므로 일개 제후인 조선 국왕이 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소격서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결국 1518년(중종 13년) 중종은 뜻을 굽혀 소격서를 혁파하도록 하였다. 당시 소격서와 더불어 충청도에 있던 태일전도 함께 혁파했는데, 이때 제복(祭服)⋅제기(祭器)⋅신위(神位) 등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사류들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제거되자, 중종은 모후(母后)의 병중 간청이라 하여 1525년(중종 20년) 소격서를 부활하고 초제와 기도를 행하도록 했다. 조정 신하들이 소격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도교의 담당 관청인 소격서에서 행해지던 양재기복(禳災祈福) 의식은 유교 윤리로 통제하던 조선에서 명맥을 잇기가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임진왜란(1592~1598) 후에 완전히 폐지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정암 조광조의 정치사상」,『부산사학』7,김광철,부산사학회,1983.
「중종조의 소격서 혁파 논의에 대한 일고찰」,『경상사학』6,김해영,경상대학교 사학회,1990.
「소격서의 혁파논의와 사림파」,『교남사학』창간호,이병휴,영남대학교 국사학회,1985.
「소격서연구」,『비교문학연구』7,이종은,한양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1988.
「소격서 폐지 논쟁에 나타난 조광조와 중종의 대립」,『진단학보』88,정두희,진단학회,1999.
「정암 조광조의 개혁정치 연구」,『강원사학』6,조승호,강원대학교 사학회,1990.
편저
「소격서 관계 역사자료 검토」, 이종은, 아세아문화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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