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정치조선 전기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기묘사화

명하여 대간을 불러들였다. ……(중략)……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정사는 조정에 있어야 하고, 조정의 정사는 대신이 해야 하며, 대간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뿐이다. 옛말에 ‘정사가 대각(臺閣)에 있으면 어지러워진다’ 하였는데, 근래 정사가 대신에게 있지 않고 대각에 있다. 임금과 대신이 그 폐해를 알고도 구제하지 못하자 대각의 과격함이 버릇되어 나이 많은 대신이 다들 논박을 받고 물러가게 되었다. 이것은 종사(宗社)에 관계되므로 이 폐단을 바로잡고서야 조정이 안정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어제 아랫사람들의 의논을 들으니 다들 ‘간사한 무리가 한 짓’이라 하지만, 이는 대신과 함께 종사의 대계를 위하여 협의하여 한 것이고 간사한 자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김근사 등을 전일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기는 하였더라도 어찌 대단한 일이었겠는가? 헤아려서 처리하라” 하매,

대간이 또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죄 줄 만한 일이 있더라도, 광명정대하게 그 사람들을 모아서 분부하시기를 ‘곧은 논의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고 사림의 기상을 꺾으려는 것도 아니다. 폐해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므로 마지못해 죄 주는 것이다’ 하고, 한산(閑散)에 두거나 멀리 내치면, 그 사람들도 그 죄에 승복하고 중외(中外)가 모두 즐겁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늘 쌓아 두고 결단하지 않다가 한두 사람이 어두운 밤에 은밀히 아룀에 따라 이와 같이 죄 주시는 것은 속이고 숨기는 것이 심하여 나라의 일 같지 않습니다.

신 등이 어제 간사한 무리가 은밀히 아뢰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다시 들으니 임금께서 홍경주(洪景舟)에게 비밀히 이르시기를 ‘조광조 등의 우익(羽翼)이 이미 생겨났다. 당초 현량과(賢良科)를 두고자 할 때에 나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실로 우익을 심은 것이므로 모두 다 제거하려 하였으나, 경(卿)의 사위 김명윤(金明胤)도 그 가운데에 있으므로 하지 않았다’ 하는데, 이 말이 이미 밖에 퍼졌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반드시 서로 정성으로 대하여 간격이 없고 뜻이 서로 맞아야 그 나라를 보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임금의 위엄으로 이 두세 선비를 죄 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기에 어두운 밤에 비밀 교지를 내려서 비밀스럽게 하십니까? 신임한다면 정성으로 대하여 의심하지 않아야 하고, 죄가 있다면 분명하고 바르게 죄를 정하는 것이 옳은데, 밖으로는 친근히 하고 신임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으셨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위태롭고 망할 조짐입니다. 신 등은 통곡과 눈물을 견딜 수 없습니다. 김근사⋅성운의 일은, 지난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유생들이 상소하였을 때에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저렇듯 막은 것이 매우 옳지 않으므로 아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대간이 잘못 들은 것이다. 나도 말하여 조정이 시원하게 알게 하려 하였다. 당초에 홍경주(洪景舟)가 남곤(南袞)⋅송일(宋軼)⋅김전(金詮) 등의 집에서 들으니 무사(武士) 30여 명이 문사(文士)들을 제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이것으로 고변(告變)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처치하면 될 것이다. 조광조 등의 마음은 옳더라도 언행이 과격한 것이 버릇되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사림의 습속을 바로잡게 하면 마땅한 처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육경(六卿)과 협의하여 아뢰게 한 것이다. 승정원에 이르지 않은 것은 속이는 것과 같으며, 나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스스로 안다. 비밀스럽게 전지(傳旨)를 내렸다는 것은 잘못 들은 것이다. 김명윤의 일이 퍼진 것도 잘못된 것이다. 대저 현량과는 조종조(祖宗朝)에 해 온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할 것 없다고 하였을 뿐이다. 어찌 죄다 없애버린다고 하였겠는가?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하였다.

중종실록』권37, 14년 11월 18일(무신)

命召臺諫, ……(中略)…… 上曰, 國政當在於朝廷, 朝廷之政, 大臣爲之, 而臺諫則補闕拾遺耳. 古云, 政在臺閣則亂. 近來政不在大臣而在臺閣. 人君大臣, 知其弊而莫之救, 過激成習, 使耆舊大臣, 皆被論退去, 此宗社所關, 必矯此弊, 然後朝廷安靜, 故乃爾. 昨聞下議, 則皆云邪流之所爲, 此與大臣, 爲宗社大計, 協謀而爲之, 非奸邪一人之所爲也. 謹思等前日論其不合, 亦豈大叚事乎? 其量度而處之. 臺諫又啓曰: “光祖等, 雖有可罪之事, 當光明正大, 會聚其人等而敎之曰, 非以惡聞讜論也, 非以摧沮士氣也, 弊至如是, 故不得已罪之. 或置閑散, 或爲遠貶, 則其人等亦服其罪, 而中外咸快矣. 不然而常積畜不決, 因其一二人密啓於昏夜之際, 罪之如此, 則乃詭秘之甚, 非如國事也. 臣等昨聞邪流之密啓, 今更聞之, 則自上密諭於洪景舟曰, 光祖等羽翼已成. 其初欲設賢良科, 予意以爲好矣, 到今思之, 則實樹羽翼也, 欲盡除去, 而卿之壻金明胤, 亦在其中, 故不爲云. 是言今已騰播於外矣. 君臣之間, 必推誠無間, 情志相孚而後, 可以保有其國也. 以人君之威, 罪此二三儒士, 有何難焉, 而乃至有密旨, 昏夜之間, 秘密爲之乎. 若信任, 則當推誠不貳, 有罪則當明正定罪可也, 外示親信, 而內懷剪除之心, 君心如此, 危亡之兆也. 臣等不勝痛哭流涕. 金謹思成雲事, 非以舊失言之, 其日儒生等上疏也, 居喉舌之地, 當危疑之際, 如是阻當, 甚不可, 故啓之耳. 上曰, 此臺諫誤聞之矣. 予亦欲言之, 使朝廷洞快知之. 當初洪景舟, 於南袞⋅宋軼金詮等家聞之, 則武士三十餘人, 欲剪除文士, 然豈可以此告變也. 必自朝廷處置則可也. 光祖等心雖是, 而詭激成習, 以至於此, 使朝廷矯其士習, 則處置得宜矣. 以是與六卿議合而啓之矣. 其不諭政院者, 是似詭秘, 予亦自知其非矣. 密諭事, 聞之誤矣, 金明胤事, 騰播亦誤矣. 大抵賢良科, 非祖宗朝舊事, 不必爲也云爾, 豈可爲盡除之云乎. 此誤傳之也.

『中宗實錄』卷37, 14年 11月 18日(戊申)

이 사료는 기묘사화조광조(趙光祖, 1452~1519) 등의 제거와 관련한 내용이다. 조선 시대 사림(士林)들이 화를 당한 사화 가운데 하나인 기묘사화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그 빌미로 작용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중종에게는 국왕다운 실권이 없었고, 대부분의 권력은 반정 공신에게 돌아갔다. 이 때문에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목 받은 사람이 조광조다.

조광조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첫 번째 사안은 중종의 첫째 부인 신씨(愼氏)의 복위 문제였다. 두 번째 왕후인 장경왕후 윤씨가 아들을 낳고 6일 만에 죽자 신씨의 복위 문제가 거론되었다. 사림파의 박상(朴祥, 1474~1530)과 김정(金淨, 1486~1521) 등이 의리를 내세우며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씨가 복위되어 아들을 낳을 경우 세자의 위치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염려 하에 중종이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를 들임으로써 신씨 복위 문제는 결국 중단되었다.

두 번째는 소격서(昭格署)와 기신재(忌晨齋) 혁파 문제였다. 도교를 관장하는 소격서와 불교적인 성격이 강했던 기신재가 유교 이념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들어 당시 그 행사를 이용한 훈구파들의 비행을 단절시키려 하였다. 마침내 1518년(중종 13년) 소격서는 혁파되었다.

세 번째는 문묘 종사(文廟從祀)와 현량과 실시에 관한 것이었다. 문묘는 공자의 사당을 말하며, 문묘 종사라는 것은 공자의 사당에 함께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포함시키는 것이 훈구파의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에 대해서는 그 반대가 심하여 결국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리고 현량과는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인재를 추천해 조정에 등용하자는 제도였으나, 이 역시 훈구파에게는 사림파의 세력 확장으로 비추어져 갈등이 심하였다.

네 번째는 위훈(僞勳) 삭제가 문제였다. 위훈이란 잘못된 공훈을 말한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이 즉위할 때 공신 반열에 오른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무려 117명에 달했다. 이것은 중종반정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공신으로 선정되면서 그들의 가족과 친척 등을 공신으로 올린 결과였다. 이에 조광조 등은 일등 공신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의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림 세력들은 훈구파의 공격을 받아 화를 당하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이때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나머지 김식(金湜, 1482~1520), 김구(金絿, 1488~1523) 등도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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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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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정두희, 아카넷, 2000.
『핏빛 조선 4대 사화 세번째 기묘사화』, 한국인물사연구원, 타오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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